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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 디스코와 닭장이 있었다

80년대를 추억하는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

02.01.02 16:11최종업데이트02.01.0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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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향수 부르는 '디스코의 시대'

기자에게 1988년은 '서울올림픽의 해'가 아닌 '생애 최초로 디스코텍에서 춤춘 해'로 기억된다. <바덴바덴> <코파카바나> 혹은, <영 파크> 등의 이국적인 이름을 달고 있었던 경상남도 M시(市)의 닭장(나이트클럽)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의 몽롱함'과 언제든 '함께 몸을 흔들 수 있는 여자애들' 때문에 참으로 겁도 없이 고등학교 2학년 '몸만 큰 아이'는 주말마다 호주머니를 털었고, 들키면 감수해야 할 무기정학의 두려움까지 떨치며 그곳에서 세칭 '올나이트(밤샘)'를 했다. 말하자면 '춤바람'이었다.

힙합과 레게, 테크노의 비트가 한국을 뒤흔들기 10년도 훨씬 전. '디스코 열풍'의 끝물이던 80년대 후반을 기자와 또래 친구들은 그렇게 살아냈다. 고막을 찢을 듯 들려오는 <드림 오브 리오>와 <컴백>, <브라더 루이>같은 노래들.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면 '제임스 최' 혹은 '박진감'이란 촌스러운 닉네임의 DJ들은 디스코의 고전이라 할 <섹시 뮤직>을 볼륨 높여 틀었고, 그 광기 속으로 '아바(Abba)'가 찾아와 <댄싱 퀸>을 불렀다.

무스로 범벅을 한 머리칼, 헐렁한 바지에 몸에 딱 달라붙는 셔츠, 자욱한 담배연기와 홀짝거리며 마시던 오줌냄새 나는 맥주. 밖으로 나가면 힘없고, 가난한 고등학생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선 우리 모두가 디스코의 황제 '존 트라볼타'였고, 디스코 열풍을 부른 그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가 부럽지 않았다. 아, 멋모르고 행복했던 그 시절 친구들은 다 뭘 하고 사는지.

추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바로 그 시절, 80년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게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어 화제다. 김동원 감독의 <해적, 디스코왕 되다>. 무지막지한 군사독재가 지배했기에 '겨울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살벌한 정치적 상황이었고, 해체된 농촌의 농민들이 무작정 도시로 이주해 도시빈민으로 전락, 간난살이로 연명한 경제적으로도 열악했던 80년대.

하지만 그 시절이라고 웃음과 희망이 없었을까?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가난 속에서도 숨겨진 희망을 믿었고, 어두운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잃지 않았던 순수함을 '디스코'라는 복고풍의 춤에 실어 관객들에게 돌려주는 영화, 추억한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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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디스코왕 되다> ⓒ기획시대

가난한 달동네에 사는 천하의 '꼴통 친구' 3명이 병들어 누운 아버지를 대신해 분뇨를 치우고, 술집으로 끌려간 철없는 어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깡패가 주최하는 디스코 대회에 참가해 우승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자칫 현실성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8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집권을 위해 수백 명을 학살한 군인이 대통령이 되어버린 역사부터가 전혀 현실적일 수 없지 않은가? "토지는 농민의 것이고,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고, 권력은 국민의 것"이라는 당연한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잡아다 콧속에 물을 들이붓는 장면은 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현실적이지 않다.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풍자'와 '유머' 또한 그 저항방식의 하나일 터.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바로 이 풍자와 유머를 도구로 관객들에게 '공포의 시대'인 동시에 '그리움의 시대'이기도 한 80년대의 향수를 다시금 맛보게 해준다.

매일 싸움이나 일삼는 말썽꾼이지만, 친구에 대한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해적', 가난이 지긋지긋해 자청해서 술집으로 몸을 팔러 나가는 어린 소녀 '봉자', 그 봉자가 안타깝고, 애처롭지만 아무 것도 해줄 힘이 없는 '아버지'와 오빠 '봉팔', 비록 깡패지만 가족간의 사랑을 이해하는 낭판파 주먹 '큰 형님', 삼류 룸살롱의 푼수 여급 '애란' 등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우리에게 빈곤함과 포악함의 기억도 그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듯하다.

'조폭 바람' 잠재울 '향수의 힘'으로...

지난 해 한국의 영화관객들은 조직폭력배에게 납치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돈 되는' 조폭영화만을 만드는 제작자들 탓에 '돈이 되지 않는' 영화들은 볼 권리조차 빼앗겼다는 이야기다. 이젠 정말이지 관객들은 그 엇나간 천편일률의 유행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벗어남'은 또한 모처럼 맞은 '한국영화 호황기'를 2002년에도 이어갈 수 있는 필요조건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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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세 주연들 이정진, 양동근, 임창정. ⓒ기획시대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향수'와 '추억'의 힘으로 조직폭력배의 피비린내 가득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칼부림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본다. 비록 '그 옛날 춤'이지만 정열로 활활 타올랐던 '그 시절 디스코'에 대한 그리움까지 보여준다면 더 좋겠지.

그리고, 기대 하나 더. '꼴통 3인방'으로 분한 양동근과 임창정, '큰 형님'으로 돌아온 이대근, 봉팔 아버지 역의 김인문, 좌충우돌하는 룸살롱 사장으로 변신한 안석환이 보여줄 연기. 지레짐작 너무 큰 기대를 가지는 것 아닌지 몰라도 '이만한 캐스팅'은 어느 한국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2002-01-02 16:0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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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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