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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지리 요시아키의 영화가 최근 극장에 개봉이 되었죠? <무사 주베이>란 이름으로 개봉된 <수병위인풍첩> 말입니다. 전 '불법' 비디오로 봤기 때문에 극장에서는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피바다에 굉장히 직접적이고 극한적인 성적 표현이 난무하는 걸 보며 즐거워 괴성을 지르면서도 , 아하, 국내 극장개봉은 힘들겠군, 했었거든요.
그런 제 예상을 깨고 극장 개봉을 무사히(?) 했을 뿐 아니라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이하 PIFF)에서는 이 감독의 세 번째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뱀파이어 헌터 D>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했습니다. 역시 이 영화도 감독의 세 가지 특징인 섹슈얼한 묘사, 폭력성, 하드고어한 묘사에는 변함없습니다.
기쿠치 히데유키의 원작과는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원작자가 이 영화를 보면 무척이나 흡족해 하지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와지리의 영화작법 자체가 워낙에 스타일리쉬해서 왠만큼 까다로운 비주얼이라도 꼭 들어맞게, 가끔은 전율할 정도로 뛰어나게 묘사하기 때문이지요.
이 이야기는 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뱀파이어는 전설 속의 박제가 아니고 인간과 함께 사는, 아니 더욱 강하고 지적인 존재로 그려지죠. 무지하고 공포에 질린 인간들은 그저 그들을 피해다닐 뿐입니다. 사람들은 뱀파이어를 퇴치하기 위해 뱀파이어의 목에 현상금을 붙이고 이들을 소탕할 사냥꾼을 찾습니다.
이 현상금 사냥꾼(바운티 헌터, 아아... <엑스 파일>이 끝난 이후로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죠?) 들 중에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뱀파이어인 D, 던필도 있습니다. 그는 피를 찾는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자신의 반쪽인 뱀파이어 퇴치에만 몰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니까요.
인간들의 요청에 의해(물론 돈을 매개로 하기는 하지만) 목숨을 걸고 뱀파이어를 죽이는 헌터들이지만 인간에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닙니다. 여성 헌터인 레일라가 마을에 가솔린을 사러 갔을 때 주유소 주인이 보여주는 두려움에 찬 시선이라던가, 바에서 주민들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보통 사람들이 헌터들을 달갑잖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D의 경우는 더하죠. 그에겐 어떠한 것도 팔지 않는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D는 상당히 냉철하지만 가끔 뜻하지 않은 친절을 베푸는 묘한 인물입니다. 가와지리 특유의 강하고 날렵하고 냉철하며 감정적으로 잘 단련된 남성상이죠. (이런 인물을 두고 '후까시를 잡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답니다. ^^;; 일본어니까 쓰지 맙시다. ^^;;)
그래서일까요, 수명이 5000년에 달한다는 뱀파이어 헌터 D의 모습은 먼 미래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기사풍입니다. 물론 중세 기사의 낭만적인 풍모는 완전히 제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누아르 영화의 남자주인공처럼 하드보일드하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끈끈한 애정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현상금 사냥꾼들은 형제애와 동료애로 뭉쳐져있고, 사냥꾼 그로브는 레일라를 사랑하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영화의 발단이며 절정을 이루는 가장 강한 뱀파이어 마이어와 인간 샬럿의 사랑은 처절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강렬합니다. 얼마나 사악한지 깊이를 알지 못할 정도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석양 속을 걸어나오는 뱀파이어(뱀파이어는 햇빛을 받으면 죽는데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모습은 로맨티시즘을 완성하는 장면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터 던필은 이 모든 감정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습니다. 알지 못할 친절은 있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질 정도로 그는 타인과의 교류도, 의지처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무사 쥬베이>를 보신 분들이라면 좀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미국시장 공략 때문이겠지만 성적인 묘사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 이야기에 담긴 성적인 은유가 간혹 눈에 띌 뿐 전작에서 보여주던 극한적인 성적 묘사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감과 스크린 밖으로 피가 튈 듯한 액션묘사는 가히 신기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템포로 시작했다가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쉼쉬기도 힘들만큼 몰아치는 액션장면을 즐기는 감독의 기호가 반영되었다고 봐야겠죠.
일본 에니메이션 특유의 섬세하고 회화적인 그림에 풍부한 배경, 거기에 아카펠라 합창곡과 테크노를 넘나드는 사운드 트랙은 시청각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영화 포스터에 박힌 'Disney vs Vampire Hunter D' 라는 문구가 영 빈말처럼 느껴지진 않는군요. 이렇게 처절한 로맨티시즘에 아름다운 그림, 엄청난 속도감을 가진 종합선물세트가 솜사탕 디즈니에 질린 미국 애니메이션 팬들이 입맛을 얼마나 자극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부산 사는 이점을 맘껏 누리며 영화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매진된 영화들을 잘도 골라 표를 끊어놨거든요.
오늘은 이 영화와 <성석전설>, <고하토>를 보았는데, 암만해도 <뱀파이어 헌터 D>는 국내 개봉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다른 것들은 상대적으로 개봉가능성이 불투명해 보이는군요) 소개해 보았습니다.
남은 기간동안 하루 한 편 정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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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08 2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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