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요사>를 기록한 주체는 몽골족 원나라 조정이다. 요나라 조정이 강조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 전쟁에 관한 자료를 남겼기에, 원나라 조정 역시 같은 방향으로 기술했으리라 볼 수 있다.
요나라는 강조의 이름을 거론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강조는 이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때문에 강조 1인이 주목을 끌다 보니, 외교·국방의 시너지 작용이 관심을 덜 끄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종시대 역사를 담은 <고려사> 현종세가에 따르면, 제2차 때 요성종이 지휘한 병력은 40만이다. 압록강을 막 넘은 이 대군을 일주일 간이나 묶어놓은 부대가 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배우 지승현이 연기하는 양규 부대가 바로 그 주역이다. 이 부대의 활약은 거란군의 군사작전이 초장부터 꼬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화진 점령에 실패한 요성종은 이 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다음 작전에 착수했다. 하지만 흥화진을 그대로 둔 채 무작장 남하할 수는 없었다. <고려사> 양규열전은 요성종이 20만 명은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 명만 지금의 평북 선천군인 통주(通州)로 진격시켰다고 설명한다. 양규 부대가 거란 대군의 절반을 묶어놓은 셈이다.
이 일은 전쟁의 전체 구도에 영향을 끼쳤다. 거란군은 남하하면서도 압록강 쪽을 흘끔흘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앞만 보고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거란군이 개경에 침입해 궁궐을 불사른 뒤 도로 퇴각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양규 부대의 전공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흥화진에서 뛰어나가 거란군에 장악된 고려 백성과 고려 땅을 되찾는 작전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양규는 강조가 잃은 통주를 되찾았다. 또, 거란군에 넘어간 곽주성(평북 정주)을 기습해 적군 6천을 섬멸하고 그곳 백성 7천을 통주로 이거시켰다. 개경을 침범했다가 퇴각하는 거란군 2천여 명을 압록강 근처에서 격퇴하고 백성 3천 명을 해방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양규는 목숨을 다해 이 전쟁에 임했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안확은 <조선무사 영웅전>에서 양규가 김숙흥 장군과 함께 벌인 최후의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개경을 침범하고 돌아오는 거란군을 격퇴한 뒤의 일이다.
"3일 후에 적의 원병이 크게 이르러 대전(大戰)이 열릴새 양(楊)이 소수의 병사로써 1일에 3회를 승첩하였으나 병력이 점차 고갈되어가매 양과 숙흥이 모두 역전 끝에 드디어 죽게 됐다. 그러나 적 또한 큰 비를 만나 수습치 못하고 퇴주하게 되니, 최후에 후(後)장군 정성(鄭成)이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섬멸하였다."
양규는 거란 대군의 발목을 묶어놓고 이들의 작전에 차질을 줬을 뿐 아니라 본거지를 뛰쳐나가 적군을 기습하고 고려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이런 방법으로 거란군의 제2차 고려 침공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양규 부대를 비롯한 정부군만 이 전쟁에 기여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전쟁 1세기 뒤인 1123년에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은 고구려 조의선인 및 신라 화랑을 계승한 고려 승군들의 역할을 언급했다.
고려가 요나라에게 거짓말을 했던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