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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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 직면한 위기는 드라마 주인공들의 조력으로 점차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숙이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금희(김성령)는 대학 교육까지 받은 세칭 팔자 좋은 사모님이다. 전업주부인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중 메시지'(성녀이면서 요부가 되라는)를 강요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녀가 가부장의 집을 부수고 떠나기 위해선 이를 자각할 모멘트가 필요하다.
금희가 정숙을 돕는 것을 안 남편이 고작 이런 여자였냐고 힐난하자, 그녀는 주술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편과 가정에 헌신했지만 성인 용품에 관심을 보이고 이로 인한 해프닝에 연루되자, 즉시 아내 자격 없음으로 추락한 보잘것없는 지위가 고작 자신이 행복하다고 붙들고 있었던 삶이 아닌가.
1993년 공지영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여성들 사이에서 대 히트를 친 것은 당시 여성을 억압했던 사회적 성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각성한 금희는 정숙과 함께 성인용품 방판에 나선다.
유부녀 4인방의 성인 용품 판매 네트워크
영복(김선영) 역시 돈벌이를 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가정 경제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고등학생인 딸에게 공부 방 하나 내주지 못하고, 초등학생 아이의 우유 급식비를 주지 못하는 궁색한 살림살이가 한스럽다. 게다 포대기에 업혀있는 어린 아기까지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생각을 하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옹색한 살림을 필 수단으로 성인 용품 방판이 등장했다면, 사실 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동네 미장원을 운영하는 주리(이세희)는 건물주의 갑작스러운 임대료 대폭 인상으로 곤경에 처한다. '미혼모'로 홀로 아들을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왔지만, 대폭의 임대료 인상이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성인 용품 방판으로 투잡을 뛰기로 한다. 이렇게 유부녀 4인방의 성인 용품 판매 네트워크가 결성되고 각각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간다.
이들의 도전이 마을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마침내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감시하고 징치하려 든다. 정숙이 세 들어 사는 집에 'SEX'라는 낙서를 붉은색으로 대문짝만하게 갈겨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SEX'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니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단어는 발화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극 중에서 여자들이 'SEX'를 발화하지 못하고 발음을 흘리거나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성을 금기시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반영한 것이다.
금지된 성이라는 맥락에서 영화 <거룩한 분노>는 참고할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참정권을 쟁취하는 여성들의 투쟁 서사지만, 가부장에 억눌린 성에 대한 담론을 무게 있게 다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에 대한 주도권을 남성이 쥐고 있는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들의 전유물을 깨부수지 않는 한 다른 권리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남편에게 부부관계에서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낀 적이 없다고 소리치는 등장인물의 발화가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어떤 버전으로 구현될지 자못 궁금하다. 여성의 성에 대한 욕구와 담론은 은폐되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만 한 걸까. 제2 페미니즘의 모토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다. 그 가치가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통해 멋지게 쟁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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