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수많은 첩보물 배경이 된 냉전 당시, 동구 사회주의권을 대표하는 최고 정보기관은 당연히 소련 KGB였다. 하지만 다음 서열을 대라면 다들 아리송해질 것이다. 해당 분야에 조예가 있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동독 '국가안전부', 속칭 '슈타지' 기관이다. 무자비한 암살과 테러 등 파괴 활동이 연상되는 타 기관과 달리 슈타지는 상대적으로 무색무취한 인상을 지녔지만, 그 정보 능력은 KGB에서 파트너로 존중할 만큼 대단했다.
특히 슈타지는 자국민 통제와 서독을 대상으로 한 기밀 획득 및 정보 교란에서 항상 판정승을 거둘 정도로 실력을 자랑했다. 비결은 인구 대비 세계 최대 규모의 요원과 정보원 비율에서 찾을 수 있다. 1600만 명 남짓했던 동독 인구 중 비밀경찰은 10만 명, 정보원은 20만 명에 달했다. 인구 50여 명당 1명꼴로 슈타지와 관련된 셈이다. 이 비율을 능가한 건 북한이 유일했다. 대다수 시민은 통일 이후에 자신이 감시당해 왔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현실에 구현한 것처럼 보이던 슈타지의 감시는 통일 이후 여러 미디어의 소재가 됐다. 그런 사례 중에도 가장 완성에 가까운 작품은 역시 2006년 영화 <타인의 삶>일 것이다. 국내 개봉 후 17년 만에 재회하게 된 이 영화 속 동독의 음침한 그림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함의를 제시할 수 있을까?
최정예 도청전문요원, 딜레마에 빠지다
장소는 독일 경찰학교. 정보요원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이 한창 진행 중이다. 현직 정보요원이 자신의 현장 사례를 차분하지만 긴장 가득한 가운데 강의한다. 그는 이웃의 서독 탈출을 조력한 것으로 의심받는 용의자 심문 경험을 학생들에게 풀어낸다.
그는 절대 고함을 지르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대신에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심리적으로 거미줄에 걸린 벌레를 옥죄듯 차근차근 밀어붙인다. 똑같은 질문을 40시간째 거듭 되풀이하는 심문 방식에 학생이 인권 침해가 아니냐 묻자, 그는 결백하면 화를 내며 격앙될 테고, 죄가 있다면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이라 경험담을 전수한다.
강사는 취조실에서 특이한 버릇이 있다. 심문당하는 용의자를 의자에 앉힌 후 손바닥을 엉덩이 밑에 깔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누구도 이유를 대지 못한다. 정답은 체취를 수집해 경찰견 추적용으로 수집하기 위함이다. 다들 상상하지 못한 집요함이다. 그리고 중간에 인권 문제를 거론한 학생의 자리에 몰래 표시를 한다. 그는 정보요원 적성 검사에서 탈락할 것이다.
강사는 이제 본업으로 복귀한다. 그는 국가안전부 대위 '비즐러'다. 감정이란 없는 듯 추적에만 몰두하는 그의 실력은 슈타지 내에서 정평이 나 있다.
친구인 슈타지 중령 그루비츠 역시 그를 높이 신뢰하며 특별한 임무를 맡긴다. 동독 문화부 장관에게 표적이 된 젊은 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해 불온한 꼬투리를 잡아내라는 지시다.
비즐러는 슈타지 요원들과 함께 드라이만의 집에 잠입해 빈틈없이 도청 장비를 설치한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집요하게 드라이만이 집에 머물 때마다 빠짐없이 도·감청을 시행하고 이를 보고서로 기록한다. 물샐 틈 없는 비즐러의 업무능력으로 볼 때 드라이만에게 뭔가 약점이 있다면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슈타지의 구호처럼 '공산당의 방패와 검' 역할에 확신을 지니고 임하던 비즐러는, 그의 임무가 실은 드라이만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에게 흑심을 품은 장관이 사주한 것임을 간파한다.
출세를 위해 장관의 부당한 요구를 수락한 그루비츠와 달리 비즐러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고독한 임무 수행은 그런 비열한 책략의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매일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일상을 염탐하는 사이 비즐러는 그들의 순수한 예술혼과 자유를 갈망하는 양심에 감화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보고되면 신변에 위협이 될 그들의 행동을 적당히 무마한다. 그러나 감시당하는 줄 모르는 드라이만은 위험천만한 거사를 준비하고, 정보기관은 심증을 갖고 그들을 추적하게 된다.
비즐러 역시 상관에 의해 일 처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의구심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정부 요원이 고의로 불순분자를 감싸는 것 아닐까? 이제 비즐러는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과연 이 숨 막히는 추적극의 끝은 어떻게 결착이 날까?
독재의 민낯을 묘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