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의 카니발' 스틸
씨네소파
80분 남짓한 영화 시간 중 50여 분이 짧지 않은 지역 여성운동 연대기에 할애된다. 이 정리만으로도 <마녀들의 카니발>은 사료적 가치를 완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분량은 어떤 내용을 채워냈을까.
중반 이후부터 영화는 시대도 분야도 제각각인 지역 여성운동을 통합적으로 선보이고자 한다. 일단 대학 공간에서 태동한 여성주의 활동은 선후배 만남과 꾸준한 교류, 그리고 이들이 지역 내 관련 단체와 활동에 진출하면서 주요 전환점이 된 사건들로 연결된다. 그리고 단체 토론회나 집회에서 원로 세대와 이제 갓 활동 개시한 신세대 간의 만남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
해당 부분은 세대 담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그들의 '자매애'가 발현되기에 첨예한 대립보다 경청과 당부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건도 변했고, 이제 활동 시작하는데 어렵게 여기까지 온 차세대에게 옛날과 비교하며 '좋았던 옛 시절' 대입하면 다들 달아난다는 하소연에 박장대소 공감하는 풍경이 훈훈하다.
하지만 연속성을 일정하게 확보한 대학 여성주의 활동 및 지역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관련 단체 프로그램과 공동 대응 외의 분야는 파편적 나열에 머문다. 시작을 맡았던 여성 노동운동은 한참 뒤에 현재 대학 청소노동자 비정규직 철폐 투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연결고리가 확연한 대학가와 단체 활동가들의 유대관계에 비해 여성 노동자들 활약은 그저 삽입된 영상에 가까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친밀함이 전제된 전자와 비교하면 후자는 카메라의 간격이 확연하다. 태동기의 선배 활동가들과 현실 비정규직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동년배이지만, 영화에서 이들이 교류하는 풍경은 딱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과거와 현재 단순 대입에 그친다.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과 투쟁에 결합하는 모습은 당연히 등장하지만, 지역에서 일상적인 '품앗이' 연대 이상 해설의 부재는 아쉬운 대목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이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다양한 분야에서 약진이 개시된다. 여성운동 중에도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여성 장애인 운동을 선도한 원로 활동가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전체 운동' 내에서도 외면당하던 여성 장애인은 여성운동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된다는 호소는, 영화 후반에서 별도로 호명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 교차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란 측면에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첨예한 쟁점을 우회하는 방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