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tvN 스토리
소헌왕후는 1395년 경기도 양주목에서 심온의 큰 딸로 태어났다. 소헌왕후의 가문은 청송 심씨로 조부인 심덕부는 고려 말의 재상이자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으며, 그 다섯째 아들인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세종의 고모)와 혼인하여 왕실의 외척이 됐다. 이어 심덕부의 4남 심온은 딸 소헌왕후를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에게 시집보내니, 무려 2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을 맺을만큼 당대에 유력한 엘리트 가문이었던 것이다.
1408년(태종 8년), 14세의 소헌왕후는 두 살 연하였던 태종의 3남 충녕대군과 혼인했다. 어린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세종실록>에는 '왕후나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하여 오직 덕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소헌왕후의 타고난 성품이 평온하고 인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부는 평생 슬하에 무려 8남 2녀를 두었고 이중에는 훗날 조선의 국왕에 오르게 되는 장남 문종과 차남 세조도 있었다.
소헌왕후는 1418년 10월, 24세의 나이에 갑자기 중전(왕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국왕이던 시아버지 태종이 세자인 장남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3남이던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 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까지 물려준 것.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면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소헌왕후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대군의 부인에서 세자빈을 거쳐 왕비의 반열까지 오르게 됐지만, 이는 훗날 그녀의 평온하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란의 서막이 된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중 최고위 재상의 관직인 정1품 영의정에 올랐다. 국왕의 장인으로서 그에 걸맞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돈 태종의 의지였다. 이어 심온이 세종의 즉위를 승인받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수많은 이들이 심온을 따르며 전송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나온 사람으로 장인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왕비에 오르면서 친정 가문의 위세도 더욱 높아진 모습에 소헌왕후도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종 즉위 원년인 1418년,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한다. 강상인은 본래 태종의 측근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병조참판을 맡고 있었다. 상왕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국정 경험이 부족한 젊은 국왕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병권(군사에 관련된 업무)과 주요한 국가중대사는 여전히 자신이 처결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강상인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태종을 생략하고 세종에게만 중요한 군사 관련 업무를 보고한 사실이 들통이 났다. 태종은 이를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여 격분했고, 강상인과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유배형을 내렸다.
몇 달후, 태종은 이미 마무리된 듯하던 강상인 사건을 돌연 다시 꺼내들었다. 강상인의 태종 패싱 사건이 고의적인 음모였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배후가 있는지 재조사라는 엄명을 내린 것이다. 다시 끌려온 강상인은 처음에는 의혹을 부인했으나 모진 고문이 계속되자 결국 뜻밖의 이름을 꺼낸다. "심온이 군사가 한 곳에 모여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옵니다." 이는 세종의 장인 심온이 나라의 군권이 국왕 세종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뜻이었다.
격노한 태종은 심온이 강상인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심온은 곧바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사소한 보고 해프닝 정도로 보였던 사건이 순식간에 왕실의 사돈이자 유력가문까지 연루된 초대형 스캔들로 번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심온-강상인 사건을 두고 태종의 '외척 숙청' 작업을 위한 정치공작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왕비였던 신덕왕후(태종의 계모), 아내 원경왕후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외척 세력에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던 원경왕후의 처가 여흥 민씨 가문을 토사구팽했으며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를 모두 잔혹하게 처형하기도 했다.
이어 태종은 아들 세종의 즉위로 새로운 외척 가문이 된 청송 심씨 역시 경계했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려온 심씨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훗날 세종의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심온을 우대하고 영의정으로 삼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것은 심씨 가문을 방심시키기 위한 태종의 전략이었다. 그 틈에 태종은 강상인에게 가혹한 고문을 통하여 심온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씌우는데 성공했다.
심온은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이미 강상인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모두 대질조사도 없이 처형된 상태라 무고함을 밝힐 길이 없었다. 딸 소헌왕후도 사위 세종도 심온을 구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심온은 제대로 된 진상 조사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심온의 사형이 결정된 다음날, 세종과 태종이 신하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는 것이다.
연회는 태종이 주최했던 것으로 보이며 세종은 여기서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했던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위로하고 비위를 맞춰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헌왕후에게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한가롭게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 더욱 가슴을 후벼파는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심온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사실 당시의 세종은 태종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만한 실권이 없었다. 학계에서는 아버지 태종의 성격을 잘아는 세종이 노골적으로 반발할 경우, 처가만이 아니라 자칫 소헌왕후마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서 몸을 사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외척 숙청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공고하게 해주기 위한 아버지의 정치적 결단이었을 이해한 세종이 이를 동조하고 묵인했다는 평가도 있다.
왕비의 가족이 천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