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1821년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가 독립한다. 미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은 신생국가였던 멕시코와 지속적인 전쟁을 통하여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갔고, 결국 오늘날의 북미 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현재에 가까운 국경선을 완성하게 된다.
다만 미국은 영토를 확장한 이후에도 기존에 남아있던 스페인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산타모니카, 콜롬비아, 로데오 등 미국 곳곳의 지명인 문화는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
1823년 미국의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는 이른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발표하며 외교 노선을 정립한다. 이는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끼리, 유럽은 유럽끼리'는 방침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유럽의 간섭이나 재식민지화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미국도 유럽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미국이 북미를 장악한 이후, 중남미 일대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연이어 독립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호시탐탐 재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미국으로서는 먼로 독트린을 통해 사실상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하여 유럽의 진출을 막으려는 '지역패권주의'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키려는 스페인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갈등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곳이 쿠바였다. 16세기에 쿠바섬은 스페인에게 정복당했고 이후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 지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되어 왔다. 당시 스페인은 쿠바를 단순한 식민지를 넘어서 오랫동안 공을 들인 자신들의 고유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18세기 들어 스페인의 국력이 약화되고 이미 많은 식민지를 잃은 상황에서도 쿠바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쿠바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던 미국은 스페인에 영토 매각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쿠바 탄압
스페인은 무려 10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쿠바인을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수용소에 감금하고 잔혹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당시 수용소에서 희생된 쿠바인의 숫자는 17만에서 40만에 이르며 훗날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모태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로 끔찍했던 인종학살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스페인의 쿠바 대학살은, 미국이 쿠바에 개입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됐다. 1898년 2월 15일에는, 쿠바의 하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폭발해 약 260여명의 미국 병사가 사망하는 '메인호 참사'가 벌어진다. 당시 충격적인 사고에 미국 황색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더해지며 그 배후에 스페인이 있다는 가짜뉴스가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러한 의혹을 극구 부인했다. 사실 스페인은 당시 미국과 굳이 전쟁을 일으킬만한 명분도 여력도 부족했다. 일각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는 음모론도 있었지만, 이 역시 비싼 주력 전함과 수백 명의 병사를 희생시켜 가면서 무리수를 저질렀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1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수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메인호 참사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이야 어찌 됐든 당시 미국으로서는 메인호 사건을 기점으로 '스페인을 응징하고 쿠바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급격히 확산된다. 그해 4월 23일, 미국은 결국 스페인에 선전포고 하면서 전쟁에 돌입한다.
엉뚱하게도 양측의 전쟁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쿠바도, 미국이나 스페인 본토도 아닌 태평양에 위치한 필리핀이었다. 사실 미국은 아메리카만이 아니라 태평양을 통하여 아시아 진출도 노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스페인의 영역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필리핀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 이는 미국이 스스로 선언한 먼로 독트린과도 정면으로 모순되는 행보이자 또 다른 팽창주의 정책이었기에, 제국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위선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해군차관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훗날의 미국 26대 대통령)은 그해 5월 1일, 상부의 지시도 없이 독단적으로 필리핀 마닐라만 공격을 명령했다. 마닐라 해전은 미국의 일방적인 완승으로 끝났고 미국 함대의 사상자는 7명에 불과했던 반면, 스페인은 사망자만 169명, 사상자는 300여 명이 넘고 함대가 궤멸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한때 무적함대를 자랑했던 스페인은 국력이 쇠퇴한 데다 세계 각지에 해군력이 분산되면서 전쟁준비에 차질을 빚으며 전쟁수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반면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을 대비해 약점으로 꼽히던 해군력을 크게 증강해 놓은 상태였다. 이어 6월에는 무혈입성으로 괌을 정복하여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스페인의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