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영화사 찬란
이런 맥락에서 아우슈비츠 근처의 나치 장교 가족들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가까웠을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 가까웠을지는 크게 고민할 여지가 없다. 거창한 인류애는 제쳐주고라도, 내가 사는 평화로운 담장 바로 뒤에서 단지 어떤 인종이라는 이유로 하루 수백 명을 태워 죽이는데도 국가가 용인했기에 이를 당연시한 집단무의식은 자신들의 초록 정원에서 웃고 떠들며 평화로운 일상을 가능하게 했다. 이 역겹고 공포스런 군상이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영화 속 루돌프 회스 중령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죽일까를 고민하다, '태우고 식히고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며 쉴 새 없이 가동되는 화로를 고안하고 작동시켜 '독일의 개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나치 장교의 가족들은 유대인의 유품이 될 소지품을 자신의 전리품인 양 거두어 쓸만한 것을 입고 먹고 쓰며 어떤 께름함도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돈 되는 물품을 포획해 부를 늘릴 것 인가만이 초미의 관심사다.
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는 히틀러의 명을 수행하고 있으니, 초록 마당 뒤로 보이는 굴뚝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태우는 연기가 뿜어져 나와도 담장 너머의 지옥은 자신과 상관없다. 수용소에서 창출되는 이익으로 17살부터 꿈꾸어온 낙원 같은 집과 가족을 일구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믿는다.
유대인 여성을 하녀로 부리며 언제든 "아무도 모르게 재로 만들 수 있다"는 압제자의 권력에 도취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득 전쟁에서 패하고 히틀러가 죽고 그렇게 소중하게 가꾸어온 자신들의 영지를 떠나게 되었을 때, 모든 게 자기 것이 아니었지만 자기 것이라 믿은 가해자들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짐짝처럼 수송 열차에 실리던 피해자들보다 더 억울해하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역설을 경유해 도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그토록 핍박받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저토록 포악한 광신도 집단이 되어 자신들이 겪은 절멸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고 있느냐 말이다. 또한 유대인이 절멸되는 과정에 부역한 유럽 국가들은 홀로코스트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 골몰하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조력했다. 그리고 그 일방적 정치적 결정의 책임을 지금 3만이 넘는 민간인(주로 아이와 여성)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음으로 대속하는데 이스라엘을 향해 학살을 멈추라고 호통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홀로코스트에서건,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서건, 세계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지만,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는 탈역사화되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학살의 피해자가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의 피해자로 인정받는 순간, 가해와 피해의 교차성을 버리고 피해자 정체성만 남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순수한 피해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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