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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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 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고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던 건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영화는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하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 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 소환법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 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 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이다.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자주: 문학 작품에서 결말을 맺거나 갈등을 풀기 위해 뜬금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플롯 장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는 거 같아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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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