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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창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동안 한반도는 러일전쟁(1904-1905)이 발발하며 정세가 한층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05년 4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안창호는 기존의 한인친목회에서 정치결사 성격으로 발전한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오르며 본격적인 구국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안창호는 미주 한인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하고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인들의 애국심과 독립심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안창호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공립협회는 다시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한다. 당시 안창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2년 뒤인 1907년, 안창호는 돌연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9월에는 고향인 평양에서 교육기관인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운동에 나선다. 또한 안창호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도 전개한다. '새로운 민족'이라는 의미를 담은 신민회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 걸맞은 소양을 갖춘 국민양성을 목표로 했다.
이어서 안창호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권회복운동을 알리는 연설회를 가졌다. 안창호는 "조국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애국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안창호는 탁월한 연설가로 명성을 떨쳤고 그의 연설을 듣고 감명한 이들이 환호을 보내거나 눈물을 짓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당시 청중으로 참여했던 이강과 이승훈 등은 안창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불씨는 뜻밖에도 안창호에게도 번졌다. 안중근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으며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하얼빈 의거 이후 안창호 역시 안중근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체포된다. 다행히 별다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얼마 후 석방되었지만 지속적인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안창호는 귀국 3년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창호가 설립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의 4개지역에 지방총회를 두고 사실상 준정부 역할을 담당하며 해외 한인들을 돌보는데 앞장섰다. 안창호는 국민의무금 납부제도를 도입하여 해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벌어진다. 이에 고무된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추진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게 된다. 41세의 안창호는 임시정부 수립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간다. 행동력과 자금동원력을 인정받은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오늘날의 행안부장관)이라는 요직에 추대되며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데 당시 한인 독립운동세력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만이 아니었다. 경성에는 이승만의 한성정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동휘의 대한국민의회 등 리더와 조직이 각기 다른 여러 군소 임시정부가 난립해 있었다. 분열된 체계에서 하나된 독립투쟁은 불가능했다.
이에 안창호는 지속적인 협상을 통하여 이승만과 이동휘를 간곡히 설득하며 1920년 마침내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설립하는데 성공한다.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았다. 정작 원조 상하이 정부의 리더였던 안창호는 서열상 크게 떨어지는 한직인 노동국 총판 자리를 맡는데 그쳤다. 측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이것은 오직 애국심에서 나옴이요, 결코 사욕이 있음이 아니다"라면서 본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기꺼이 양보했다.
학계에서는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을 안창호의 대표적 업적이자,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로 보고 있다. 안창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통합 임시정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분열된 독립투쟁의 동력은 크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안창호의 희생으로 통합 임시정부는 비로소 하나된 독립투쟁의 초석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폭탄 의거'가 발생하면서 안창호가 관련자로 체포된다. 사실 안창호의 체포는 불운한 우연에서 비롯됐다. 일본 경찰은 윤봉길의 배후를 추적하다가 상하이 한인 회장이었던 이유필을 체포하려고 자택으로 몰려왔는데, 하필 그날 이유필의 아들에게 단순한 볼일이 있어서 방문했던 안창호가 애꿎게 체포당하고 만 것. 김구는 안창호에게 집에 머물라는 전언까지 보냈지만, 길이 엇갈려서 전달을 받지 못한 것도 불운이었다.
안창호는 일제로부터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생활을 하다가 예정보다 1년 4개월 빨리 출소하게 된 안창호는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한동안 산속에 은거했다. 하지만 석방 2년만인 1937년, 59세의 안창호는 당시 강화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민족운동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르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이 무렵 이미 노년에 접어든 데다 일제의 반복된 심문과 형무소의 혹독한 겨울을 거치며, 안창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된다. 마지막을 직감한 안창호는 "슬퍼마라,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담담한 유언을 남겼다. 한편으로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전쟁을 시작했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패망할 것이다"라며 일제의 몰락을 예언하기도 했다.
1938년 3월 19일 자정, 안창호는 60세의 나이로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영면에 들게 된다. 안창호 사후 7년 만에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다. 그리고 1962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헌신을 인정받아 안창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건국 공로 훈장 중장'에 추서된다.
안창호 선생은 평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의 시작'이라는 철학을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안창호는 작은 일이라도 옳은 일을 찾아 반드시 실천하려는 노력을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구성원 각자가 최선을 다하려 뿌린 씨앗이 모여서 결국은 '세상을 밝히는 위대한 일'을 이뤄낼 수도 있음을 증명해냈다. 안창호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까지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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