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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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반열 오른 소련
최근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36-1938년까지 대숙청 시기에 밀고로 체포된 이들은 3년간 17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60만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사형당한 이들만 무려 68만 명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마저도 축소된 것이며, 실제로는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 거로 추정한다. 서방의 한 만평에서는 '스탈린이 사람들을 삽으로 퍼서 지옥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묘사할 만큼 스탈린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엔카베데의 만행은 소련 내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초기에 나치 독일과 손을 잡은 소련군은 폴란드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약 45만 명에 이르는 포로들을 확보했다. 스탈린은 이들 중 폴란드군 간부와 고급 지식인, 전문가 출신 포로들을 선별해 엔카베데에 넘겨 노동수용소로 보냈다. 여기서 사회주의 수용을 거부하는 이들은 '소련의 타협할 수 없는 적'으로 규정해 잔혹하게 처형했다.
1940년 3월에 벌어진 '카틴숲 포로 대학살' 사건으로 최소 2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이 사망했고, 이는 스탈린과 엔카베데가 저지른 최악의 악행으로 꼽힌다. 스탈린의 이러한 잔혹한 조치에는 이웃나라인 폴란드가 혹시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스탈린은 훗날 독일의 기습적인 소련침공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카틴숲 학살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이번엔 나치의 소행으로 떠넘기며 히틀러와 낯 뜨거운 상호 비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진실은 반세기가 흐른 1990년에 이르러서야 소련 정부가 당시 서기장이던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카틴숲 대학살은 스탈린의 소행'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편 소련은 2차대전 기간 동안 '군정보총국'을 별도로 설립해 국외 첩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조직을 구축했다. 이들은 전 세계에 스파이들을 파견해 나치 독일을 비롯한 연합국들의 군사관련정보까지 수집했다. 엔카베데와 군정보총국은 소련 첩보기관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당시 소련의 군정보총국 스파이로 유명세를 떨친 대표적인 인물이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첩보물의 명작 <007>시리즈의 원작자이자 실제로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이언 플레밍은 조르게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험한 스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소련의 대일본 정보라인 총책이었던 조르게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결정적인 극비 정보를 획득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 침공해 오자 독일의 동맹인 일본까지 양쪽에서 협공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통답게 조르게는 "일본은 당장은 소련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확신에 찬 첩보를 모스크바로 전송했다. 주저하던 스탈린은 조르게의 첩보를 신뢰해 시베리아에 배치했던 주력 기갑사단을 독일과의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승부수를 던졌고,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적중했다. 한 스파이의 냉철한 판단이 전쟁의 운명까지 갈라놓은 것이다.
소련은 결국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인정받았다. 전후에는 미국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다.
사회주의 전파 위한 첩보활동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첩보활동에 열을 올리게 된다.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5인조' 사건은 서방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소련 비밀공작 기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킴 필비 등 5인방은 영국인 출신의 고학력 엘리트이자 영국의 주요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소련의 '이중스파이'로 활약한 인물들이다.
당시 유럽에는 이들처럼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영국의 정보기관 M16 소속이었던 필비는 자국의 주요 기밀 정보들을 대거 엔카베데에 전달했다.
그 결과 동유럽에서 활동했던 많은 영국 첩보원과 영국 망명을 노리던 소련인들의 신상정보가 노출됐다.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요원들을 침투시킨 미영합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수많은 CIA-M16 요원들이 사망한 것도 모두 필비의 소행이었다. 이후 행적이 탄로 난 필비는 1963년 소련으로 망명해 여생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그와 케임브리지 5인방은 영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반역 스파이'로 불린다.
악명높은 엔카베데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련의 새로운 최고지도자로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1954년 해체된다. 이어 흐루쇼프가 자신만의 새로운 첩보기관으로 창설한 것이 훗날 '크렘린의 검은 손'으로 불리는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다.
KGB는 국내외 정보 수집, 반체제 인사 단속 등 엔카베데의 기능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만 엔카베데와의 차이는 맞춰 입은 제복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던 전신과 달리, KGB는 정체를 숨기고 일반인들 속에 섞여 들어가 비밀스러운 활동을 추구했다는 것. 누가 KGB인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엔카베데와는 또 다른 신비스러운 공포감과 불안감을 안겼다. 1980년대에 이르면 KGB의 규모는 약 48만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어 세계적인 비밀공작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냉전 시대 동안 두 강대국인 소련을 대표하는 KGB와 미국의 간판인 CIA 간에는 치열한 첩보 전쟁이 펼쳐졌다. 특히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과 소련은 실제로 3차대전의 위기까지 치달은 사건은 유명하다.
전쟁 위기에 전환점을 마련한 것도 양국의 첩보전에서 비롯됐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초창기 쿠바 침공과 전면전이라는 강경책이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소련의 고위 정보국 장교이자 이중 첩자였던 올레크 펜콥스키를 통해 '소련의 미사일 기술이 아직 허술하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고 온건한 '협상'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결국 양국은 서로 미사일 기지 철수에 합의하며 한발씩 양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후 펜콥스키는 1963년 KGB에 스파이 활동이 적발되어 처형 당한다. 소련 입장에서는 배신자이지만, 펜콥스키가 제공한 귀중한 정보로 인하여 세계 핵전쟁의 위기까지 막아낸 첩보전의 긍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