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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부터 주일학교, 수녀님 덕분에 연기 욕심 생겼다"

[인터뷰] 영화 <샤인>의 배우 장선

24.08.11 17:24최종업데이트24.08.1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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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의 카페에서 <샤인>의 라파엘라 수녀 역의 배우 장선을 만났다. 영화 <샤인>은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예선(장해금)이 라파엘라 수녀(장선)와 스텔라 수녀(정은경)의 돌봄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다가, 자신의 분신 같은 새별(송지온)을 만나 아픔까지 치유하는 이야기다. 사람 간의 만남과 기쁨, 이별의 과정을 외로움 안에서 천천히 바라보는 작품이다. 제목 '샤인'이란 말처럼 반짝이는 윤슬 같고 따뜻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영화다.

장선은 이승원 감독의 2017년 <소통과 거짓말>로 데뷔했다. 한국 영화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 연기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걸까. 데뷔작에서 압도하는 카메라 장악력을 펼치던 장선은 박석영 감독의 <바람의 언덕>에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엄마와 만나게 되는 딸 한희를 연기했다. 이후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에서 초등학생 딸을 둔 억척스러운 엄마 경희를 맡았다. <샤인>에서는 박석영 감독과 재회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라파엘라 수녀로 변신했다.

작품마다 전작이 생각나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장선 본연의 모습과 직업 배우로서의 철학, <샤인>의 비하인드 등 다채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캐릭터로 다가가는 배우
 
 배우 장선

배우 장선 ⓒ 눈컴퍼니

 
- 영화 <바람의 언덕> 이후 박석영 감독, 정은경 배우와 재회했다. 전작에서 정은경과 모녀 관계였고, <샤인>에서는 선후배 관계로 설정돼 친밀한 사이로 등장한다. <샤인>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먼저 <샤인> 측에서 제안했다. 당시의 <샤인>은 지금과는 다른 결의 이야기였지만 수녀 역할이라는 점은 같았다. 감독님에게 힘든 일이 생겨 작품이 지연되고 있어 다른 작품을 먼저 하자고 했다. 그게 <바람의 언덕>이었다. 그때 은경 선배와 처음 만났다. (오래 걸렸지만) 감독님이 함께하자고 했던 약속을 모두 지켜줬다.

<바람의 언덕> 때는 속마음을 완벽히 털어놓고 대화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배우들끼리 서로 서먹한 관계로 설정돼 숙소도 일부로 따로 쓰며 역에 몰입했다. <샤인>은 반대였다. 함께 숙소를 쓰면서 의지하는 관계가 됐고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 <바람의 언덕> 때 전국으로 GV를 꽤 오래 다녀 배우들끼리 사적으로 친해지기도 했다. 엄마, 선배, 스승 같은 관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 <샤인>의 장해금, 송지온과 호흡은 어땠나.
"해금이는 <바람의 언덕> 중 기차 장면에서 잠시 나오기도 했고, 단편 <너의 오름> 때도 함께해 안면이 있었다. 본격적인 호흡은 처음이었다. 해금이가 맡은 예선은 할머니를 잃고 세상과 단절하려는 아이다. 맡은 역할처럼 현장에서도 예선이처럼 어른스럽고 아역 배우들을 리드했다. (그래서인지) 아역이란 생각보다 동료 배우로 느꼈다. 실제 어릴 때부터 경력이 화려한 배우기도 하다. 촬영 때는 고1이었고 지금은 고3이다.

배우들이 다 함께 제주에서 생활해서 편하게 즉흥 연기를 했다. 지온이는 원래 대사가 없는 비전문 배우였다. (신나게 놀다가) 슛 들어가면 말하지 않기를 약속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웃음) 그래서 지온이가 그 상황에서 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방향을 만들고 대사와 상황의 자유를 줬다. 그랬더니 영화와 실제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재미있는 상황이 생겼다.

학생 역할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즉흥 연기를 하라고 권했다. 수녀님과 신부님이 나누는 대화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했는데, 아이들의 즉흥 연기 때문에 독특한 모습이 나왔다. 정해진 대사와의 즉흥 연기가 마법처럼 연결됐다. 어려웠지만 좋은 자극을 받았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 영화 촬영 도와"
 
 영화 <샤인> 스틸컷

영화 <샤인> 스틸컷 ⓒ 인디스토리

 
- 제주도에서 촬영하며 겨울과 여름의 계절이 오롯이 담겨 있다. 바람, 빛, 바다의 공기까지 스크린에 스며들어 아름다운 영상이 담겼다 .
"겨울은 일주일, 여름은 한 달 정도 제주에서 보냈다.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날씨가 인상적이었다. 촬영하며 유난히 구름, 햇살, 비 등 날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계곡에서 오카리나를 부는 장면에서 약속이나 한 듯 빗방울이 떨어졌고, 다음 장면인 새별이가 성당에 처음 올 때 비가 오는 장면과 연결됐다.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이 연출됐다."

- 종교인이야말로 홀로 신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수녀 라파엘라의 전사가 궁금하다.
"죽을 때까지 수녀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종신서원'을 하고 정식 수녀가 되기까지 10년 정도 걸린다고 들었다. 일종의 수련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이 사람이 수녀로 살아갈 그릇인지, 속세를 떠날 수 있는지, 감정적으로 주변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지 등등 긴 시간이 필요하다. 라파엘라는 사연이 많은 인물이다. 쉽게 동되고 여려서 주변 수녀들이 걱정을 많이 한다. 스텔라(정은경)와는 인연이 있다. 라파엘라 어머니가 아프다 돌아가셨는데 스텔라가 임종을 봐 주기도 했고 라파엘라를 돌봐주기도 했다."

- 영화의 주요 키워드는 '돌봄'이다. 소재를 환자, 아이, 그리고 인간으로 확대하는 다리 같은 존재가 라파엘라다.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인간 '장선'을 지우려 노력한다. 역할 자체로 그 세계에 있고 싶다. 인물의 삶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커진다. 어떤 인물인지, 어떤 식으로 말하고, 걸을지 다양하게 상상하며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감독님과 대화를 통해 전사를 디테일하게 알아내기도 한다. 대본을 자세히 읽으면서 답을 찾으려 분투한다. 때로는 낯선 사람의 SNS를 훑어보면서 그 인물이 아닐까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캐릭터 준비를 철저히 해서 현장에 가는데, 막상 현장 가서는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며 조금씩 캐릭터가 달라지기도 한다."

- 최근에는 아이를 돌보는 어른을 자주 맡았다. <샤인>에서는 예선의 언니 혹은 이모, 엄마 같은 '라파엘라'가 추운 겨울에 만난 따뜻한 햇살처럼 느껴졌다.
"<비밀의 언덕>은 이지은 감독님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든 작품이다. 그래서 각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도 바빠서 활동을 못 할 거 같으니, 반장이 됐어도 안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영화 속 경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있다고 봤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됐고 열심히 뭐든 해보지만 버겁기도 한 어린 엄마를 연기하려고 했다.

<샤인>의 라파엘라는 감정적인 장면을 많이 배제하면서 인물을 구축했다. 감독님이 편집본을 배우, 스태프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다듬어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얼굴 풀샷을 빼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보이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반드시 있다고 믿었기에 표정을 좀 덜면서 보여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기, 무형을 유형으로 만드는 시간"
 
 배우 장선

배우 장선 ⓒ 눈컴퍼니

 
-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해야 할까.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원동력이 있나.
"이게 다 수녀님 덕분이다. (웃음) 4살부터 14살까지 10년 동안 수녀님들이 있는 수련원의 주일 학교를 다녔다. 11살 때인가, 부활절을 앞두고 공연을 준비하면서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라면 끓여 먹는 즐거움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순교자를 위한 성극을 봤었는데 어린 마음에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함께 놀던 수녀님이 절절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본 거다. 그 후로 연기에 완전히 매료됐다. 책에서 연극, 연기라는 단어만 나와도 좋았다. 중학교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계속했다.

카메라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재밌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시간을 애정한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연기로) 살아가는 시간이 좋다. 성극을 준비하는 시간이 행복했던 것처럼 무형에서 유형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아직도 신난다.

얼마 전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공연에서 실존 인물을 연기했다. 그때는 무대 에너지보다 객석 에너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으로부터 '나 같아서 위로 된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떠 오른다'는 말을 들었다. 가상의 인물이라도 실존하는 사람처럼 연기하는 좋더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을 연기한다는 게 매번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늘 새로운 캐릭터를 마주하는 두려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있지 않나.
"항상 아쉽고 두렵다. 그럴 때는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 인물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이 커질 때는 늘 현장의 배우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 배우 김선영이 보석 같은 배우라고 칭찬했다.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빠져나오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거친 인물을 연기하면 평소에도 거칠어진다. (웃음) 아무래도 얼마간 그 인물로 살아왔으니 영향받는다. 그래서 작품 끝나면 '인간 장선'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간다. 본가에 가거나, 여행을 간다. 가족, 친구 등을 만나서 빨리 장선으로 회복하려고 한다.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호흡을 바꾸는 활동적인 취미 생활도 한다. 갑자기 방송 댄스를 배우거나, 피트니스 하면서 몸을 굴린다."

-최근 고향 광주에서 '장선 배우전'을 열었다. 뜻깊은 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첫 배우전이 고향 광주인 게 가족들도 올 수 있어서 너무 신났다. 상영 후 GV 때 <비밀의 언덕>을 38번 봤다는 관객분이 있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와서 기억이 남기도 했다. (웃음) 박석영, 궁유정 감독님이 직접 인사 영상을 만들어 줬는데,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배우로 지낸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니, 그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떠밀어 주는 느낌을 받았다."

-꾸준히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제가 받을 상이 맞나', '정말 받아도 되나'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결국 작품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았다. 카메라 앞에 많이 서지 않았을 때 너무 큰 상을 주셔서 빨리 성장해야겠다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다음 작품에 영향이 있을까 봐 걱정도 됐다. 그래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장단점이 있더라."

"대신 아파주는 사람"
 
 배우 장선

배우 장선 ⓒ 눈컴퍼니

 
- 하얀 도화지 같아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앞으로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불리고 싶나.
"최근에 비슷한 질문을 받아서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배우로 '안도 사쿠라'를 떠올렸다. 그 배우에게 욕심이 보이지 않았다. 배우 자체보다 캐릭터가 더 중요한 사람 같았다. 한번 꼭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배우 '장선'의 얼굴보다는 인물이 먼저 보이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비밀의 언덕> 할 때 '할매 크러시'라고 말한 적 있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꾸준함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얼굴을 발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 연기를 시작한 지 좀 됐지만, 언제나 작품은 처음 만나게 되어 새롭다. 이번에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복기하면서 다음번에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스스로 한계가 와도, 부족함을 느껴도, 다음번에는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더라. 후배에게도 이런 시행착오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선배가 됐으면 좋겠다."

- <샤인>은 장선에게 어떤 영화로 기억될 것 같나.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신 아파해주는 게 <샤인>의 키워드고 연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찍어서 그런지 촬영 때도 여행 가듯이 했고 한여름 밤의 꿈 같다. 이런 기분을 앞으로도 다시 느낄 수 생각할 정도였다. 모든 것들이 요즘 영화 같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 같고 영화라는 세상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작품이 <샤인>인 것 같다."
장선 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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