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갈무리
tvN
정작 루이 15세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마이넬 자매가 사라진 이후 루이 15세의 새로운 여인으로 나타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으로 평민 출신이었지만, 남다른 미모와 뛰어난 예술적 소양을 갖춘 여성으로 루이 15세의 눈을 사로잡게 된다.
1745년 퐁파두르는 한 가면무도회에서 루이 15세를 처음 만났다. 퐁파두르는 의도적으로 사냥의 여신 다애애나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 미모를 과시했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루이 15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루이 15세는 평민 출신이라 정부가 될 수 없었던 퐁파두르를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귀족 작위를 매입하는 것으로 신분세탁까지 해줬다. 이때부터 귀족 신분이자 루이 15세의 공식정부가 된 그녀는 훗날 우리에게 익숙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Madame de Pompadour)'으로 불리게 된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항상 외모 치장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사교계에서는 퐁파두르의 패션 스타일이 큰 유행을 일으키게 된다. 오늘까지 퐁파두르의 패션은 '폼폼 스타일'로 불리우며 현대의 대중문화에도 꾸준히 변주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퐁파두르의 영향은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18세기 들어 웅장한 바로크 양식이 쇠퇴하고, 더 화려하면서 자유롭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Rococo)이 유행하는 계기가 된다. 퐁파두르가 자신의 인맥을 넓히고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시작된 사교모임인 살롱(Saloon) 문화가 한층 발전하게 된다.
또한 퐁파두르는 수많은 지식인-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유럽에서 불고 있던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백과사전의 편찬, 훗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는 모차르트를 유년 시절에 후원했던 기록 등도 남아있다.
루이 15세는 사랑하는 퐁파두르를 위해 돈을 물쓰듯 하며 호화로운 성과 저택을 아낌없이 선물해줬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후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며 재산을 더욱 불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여러 성을 오가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런데 퐁파두르가 31세가 되며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루이 15세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됐다. 이에 퐁파두르는 왕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슴 정원'을 만들어 13-14세의 갓 성인이 된 어린 소녀들을 데려다가 루이 15세에게 직접 바쳤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곤궁한 하층민 출신의 소녀들이었다. 퐁파두르는 돈으로 소녀들을 사들여서 교육을 시켰고,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더라도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사슴 정원은 오직 루이 15세의 즐거움을 위해 사치스러운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기도 했다.
또한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국정에도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점차 권력이 커진 퐁파두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온갖 국정농단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향락에 빠진 루이 15세는 국정에 무관심했고 퐁파두르의 행보를 사실상 방관했다. 퐁파두르의 심복들이 나라의 요직을 장악하고,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퐁파두르에게 먼저 내용이 보고될 정도였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이렇게까지 온갖 현안에 무리하게 개입한 것도, 어떻게든 루이 15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서 본인의 지위를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너진 절대왕정
1756년, 퐁파두르에게 몰락의 시작이 된 '7년 전쟁'(Seven Years' War)이 발발한다. 프랑스는 외교라인을 장악한 퐁파두르의 주도로 왕위계승전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지만, 이 선택은 대실패로 끝났다. 1762년 평화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스는 아무런 소득없이 다시 한번 엄청난 재정악화에 이어 해외 식민지까지 대거 상실하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무능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을 향한 프랑스의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1757년에는 불발로 끝났지만 파리에서 루이 15세를 향한 암살시도가 일어나 프랑스를 충격에 빠드리기도 했다.
퐁파두르는 7년전쟁의 실패와 날카로운 민심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건강이 쇠약해져갔고, 1764년 4월 42세의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난다. 루이 15세는 19년간 함께했던 오랜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다수의 프랑스인들은 그녀를 저주했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사망한 후에도 루이 15세의 여성편력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58세로 환갑이 다 된 루이 15세는 당시 20대로 매춘부 출신의 잔 뒤바리를 마지막 정부로 맞아들이게 된다.
루이 15세의 딸들보다도 나이가 어린데다 비천한 경력의 잔 뒤 바리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실은 심각한 불화를 겪으며 결속력이 무너진다. 루이 15세의 며느리이자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 역시 시어머니격인 잔 뒤 바리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대놓고 무시하면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 일화도 유명하다.
잔 뒤 바리 역시 사치와 낭비로 악명이 높았다. 루이 15세는 잔 뒤바리에게 정부로서의 지원금은 물론, 보석과 의상을 마구 선물하며 재정을 낭비했다. 그녀가 루이 15세의 정부로 있던 불과 6년간 사용한 금액만,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2132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1760년대들어 가뜩이나 심각한 기근으로 민생이 피폐해졌던 프랑스인들의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이에 프랑스인들은 앙리 4세-루이 14세의 시대와 비교해 '지금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아직 절대왕정의 시대였음에도 대놓고 군주를 비난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