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깜빡깜빡>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아버지, 저 이제 엄마 기일에나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방바닥을 혼자 기어 다니는 이상한 로봇청소기 하나를 가져오던 날, 딸 영희(윤선애 분)는 이제 자주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속내를 꺼낸다. 표면적인 이유는 딸이다. 올해 고3이 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까다롭게 군다는 것.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면 뒤에 달린 먼지통만 비워주면 된다는 말과 함께다.
첫인상은 영 별로다. 그의 아버지 구영감(이호재 분)은 시끄러운 소리가 성가시고 마뜩잖기만 하다. 딸이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똑똑하지도 않다. 툭하면 혼자 길을 잃고 어딘가에 갇혀 제자리만 맴돌기 일쑤다. 적막한 집안 공기를 깨고, 우연인지도 모르는 움직임으로 마중을 나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랄까. 처음에는 그랬다. 저 차갑고 딱딱한 존재가 처음에는.
임다슬 감독의 영화 <깜빡깜빡>은 이제 치매가 시작된 노인과 구형 로봇 청소기의 만남을 주선한다. 노인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딸마저 이제 곁을 떠나고 그 자리에 남게 된 로봇. 부품조차 찾을 수 없어 다음 생(배터리 교체 이후의 시간)을 장담할 수 없는 구형 로봇 청소기 곁을 지킬 수 있게 된 노인. 두 존재는 마치 하나의 공생 관계처럼 그렇게 서로의 빈자리를 채운다. 치매가 진행되는 동안 노인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를 그렇게 가질 수 있게 된다.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과 로봇, 얼마 전 개봉해 사랑받았던 영화 <로봇 드림>(2024)의 작은 이야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작품의 이면에는 사실 1인 노인 세대와 돌봄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가 연결돼 있기도 하다. 실제로 올해 실시된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전국 1인 세대수는 모두 1002만 1413개다. 이 중, 60세 이상의 1인 가구 수는 383만 2002개로 약 38%에 해당된다. 결코 적지 않은 수다. 영화 속 이야기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02.
노인의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다. 교단에 서서 30년이 넘게 가르친 과목의 이론도, 심지어는 매일 드나드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떠오르지 않는다. 혼자였다면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 것 뒤꽁무니나 매만져야 했겠지만, 쓸모없을 줄만 알았던 투박한 로봇 하나가 조금씩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노인은 이제 갓길에 세워진 자동차의 장식을 보며 빈집에서 홀로 분주할 그것을 떠올린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시끄럽다며 방문을 닫기 일쑤던 날들을 뒤로한 채다.
밥통(쓰레기통)을 비워주며 하나둘 늘어나는 혼잣말도, 깜빡거리는 불빛을 보며 '깜빡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는 일도 어쩌면 모두 혼자인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장면이다. 대답은 없을지언정 돌아오지 않는 물음이나마 던질 수 있고, 무엇인가의 이름을 불러 공간의 여백을 잠시 채울 수 있다면 아직 그 삶에는 누군가의 자리가 분명히 놓여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게 아닐까. 노인의 삶에는 이제 분명히 로봇이 자리하게 됐고, 처음 만난 금속의 존재 위에도 인간의 마음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