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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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조카이자 후임자인 성종이 임금일 때인 1490년이었다. 이 해 상반기에 패륜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의 동생인 청천군 한환(韓懽, ?~1499)이 장인인 조지산(趙智山)을 구타했다는 풍문이었다.
이를 듣고 사헌부가 수사에 착수해보니 한환의 패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종 21년 5월 27일자 (1490.6.14) <성종실록>에 따르면, 한환은 처가에 가서 장인을 꾸짖기도 했다. 그의 첩인 일지홍(一枝紅)은 조지산 집의 기물을 부수기도 했다. 다른 날에는 신음 소리가 처가의 이웃집에까지 들릴 정도로 한환이 장인을 구타하기도 했다.
폭행 대상은 장인뿐만이 아니었다. 부인 조씨도 가정폭력에 노출됐다. 한환이 주택 개축을 이유로 부인 조씨를 친정에 보내고 그 자신은 첩의 집에 머물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첩의 집에 있다가 부인을 찾아간 한환은 부인이 자신과 싸우다가 이웃집 마당으로 달아나자 거기까지 쫓아가 폭행을 계속했다. <성종실록>은 한환이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가 부인의 옷을 찢은 뒤 벗겨버렸다고 말한다.
인간 말종의 모습을 보여준 한환에 대한 수사에도 의녀들이 투입됐다. 그해 10월 13일자(양력 11.24) <성종실록)은 "의녀 영로(永老) 등이 한환의 부인인 조씨의 상처를 조사했다"고 보고한다. 풍문으로 나도는 한환의 가정폭력 실태를 확인하고자 남성 수사관이 아닌 여성 수사관이 나섰던 것이다.
조씨의 몸 상태를 확인한 의녀들은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에 "조씨에게 상처가 많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또 다른 피해 실태도 함께 보고했다. "또 그 집에는 비자(婢子)의 시신이 있었고, 노(奴) 한 명도 곧 죽게 생겼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의녀들이 방문했을 때에 여자 노비가 죽어 있고 남자 노비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이 해에 33세인 성종 임금은 한환의 장인 폭행에 대해 장형 100대와 고신(告身, 임명장) 회수를 선고했다. 곤장 100대를 맞으면 웬만한 사람은 죽었다. 하지만 속죄금을 바치고 장형을 면죄한다는 단서가 붙어 한환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성종은 한환의 나머지 범죄인 여자 노비 살해, 남자 노비 폭행(또는 살인미수) 및 부인 폭행에 관해서는 '한양 밖으로 부처(付處)하고 부부를 이혼시키라'는 선고를 내렸다. 한양 밖으로 유배 가는 한환이 부부의 연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한 것이다.
왕실 외척이 패륜적인 살상을 저지른 중대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에서 의녀들의 가정폭력 조사 결과가 성종 임금의 판결 선고에 영향을 끼쳤다. 의녀들이 보건뿐 아니라 형사사법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의녀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범죄자 체포에 나서기도 하고, 임금의 행차 때 의장대 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환자를 돌보는 중에도 갑작스런 역할 변동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의술에만 전념해도 시원찮을 의녀들을 국가가 이리저리 혹사시켰던 것이다. <세자가 사라졌다>의 최명윤과 달리 국가에 얽매인 공공기관 의녀들은 그런 부담을 숙명으로 안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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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