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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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난 1596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전란으로 소실된 자료들을 정비하면서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의 편찬을 지시한다. 선조는 기존의 의학서적들이 내용이 질서가 없고 옳고 그름이 구별되지 않아 혼란스럽다며 한국과 중국의 의학서를 필요한 정보만 하나로 모아서 의학 이론과 처방을 정리하라고 지시한 것. 바로 허준의 대표적인 업적이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동의보감>의 시작이다.
<동의보감>을 시작하는 서문에는 '섭생(攝生)이 먼저이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병에 걸린 후에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오늘날 현대의학에서 강조하는 예방의학, 면역력 강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동의보감>에는 중국식 한자명칭과 우리말 표현을 병기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약초를 쉽게 알 수 있게 한글로 기록하게 했다. 이전에도 한글 의서는 존재했지만, 약재 이름 전체를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은 <동의보감>이 최초라는 점에서 국내 한의학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허준 역시 조선에 없는 최초의 의서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하지만 <동의보감>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역경을 거쳐야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의서 편찬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내의원의 최고 어른이 된 허준은 어의로서 왕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느라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전란이 종결된 이후 1601년 선조는 재차 허준에게 500권의 의서를 내리며 중단된 의서 편찬 작업을 재개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여러 명의 베테랑 어의들이 함께했지만, 이제는 허준 혼자서 막대한 작업을 홀로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허준은 포기하지 않고 <동의보감>의 완성을 위하여 고군분투했다.
1608년 2월, <동의보감>의 편찬이 다시 시작된 지 약 7년 만에 의서의 완성을 보지못하고 선조가 승하한다. 허준은 수석 어의로서 선조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책임을 물어 한동안 유배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허준은 고통스러운 유배생활 동안에도 의서 편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허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이듬해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내의원으로 복직시켰다.
1610년, 마침내 <동의보감>이 편찬 14년 만에 완성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불가능해보이는 방대한 양의 의서 정리를 오직 허준 혼자만의 힘으로 끝내 완성해낸 것이다. 당시 허준의 나이는 71세였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직접 지은 제목으로 '동의(東醫)'는 북의-남의로 표현되는 중국 의학에 대비되는 '조선의 의학'을 의미하며, 보감(寶鑑)은 보물스러운 귀감이라는 뜻으로 거울에 비치듯이 모든 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학이 당시 천하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중국 의학에 견줘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민족적 자부심이 반영된 제목이다.
<동의보감>은 총 25권으로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목차편'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인부터 전문가까지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동양 최고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동의보감>의 명성은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퍼졌고, 현대에는 대한민국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어 명실상부한 세계의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한 이후에도 의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허준은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을 편찬하여 전염병 연구에 매진했고, 내의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쏟았다. 그렇게 평생을 조선 의학의 발전에 헌신한 허준은 1615년(광해군 7년) 7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은 허준의 공을 높이 기려서 사후 그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품계를 내린다. 서자 출신이자 의관에게는 한 번도 내려진 적이 없었던 파격적인 조치였다.
실제 허준의 삶은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강인한 인내심과 사명감이 더 빛나던 인물이었다. 일생을 바쳐 백성들을 위하여 병을 연구하고 책을 만들어낸 허준의 장인정신은, '진정한 의술인'의 자세와 역할이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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