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역작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배트맨 리부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됭케르크> <테넷>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역사와 사회, 물리학 등 모든 인문·자연과학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영화의 줄거리를 쉽사리 따라가기 어렵지만, 끝내 인간미와 온기를 잃지 않는다.
<인터스텔라>에서 기약 없이 우주로 떠난 아빠 쿠퍼는 오랜 성간여행(인터스텔라) 끝에 지구에 남겨둔 딸 머피의 곁으로 돌아오고,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 역시 아내 살인혐의를 벗고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 역시 인간미가 넘쳐난다. 처음 영화관에서 보고 한 번만 보기에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넷플릭스에 공개돼 'N차' 관람 기회를 얻었다. 이제야 이 영화를 주제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린 핵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한, 전설적인 과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펜하이머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미국 군부는 물론 시민들, 특히 전쟁터에 자식을 내보낸 부모들은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낸 일등공신이라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이토록 '귀한' 무기를 오펜하이머가 개발했으니,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가져올 파국적 상황을 우려했다. 그래서 구소련과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자폭탄 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는 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이 핵폭탄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본격 군비경쟁에 뛰어든다.
한편 미국 국내에선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쳤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의 명성은 급전직하하기 시작한다. 특히 미 군부와 보수주의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해 미국이 소련에 밀렸다며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하기 시작했다. 미국 원자력청은 아예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서 우위를 차지한 건 오펜하이머가 '반역적 태도'로 미국 정부에 엉터리 자문을 했다고 낙인찍었다.
핵폭탄의 아버지에서 일순간 반역자로 추락한 천재 물리학자의 처지는 그야말로 극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전주의자들에게 조롱당하고 궁지에 몰린 모습을 더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틀롤 오펜하이며 역에 킬리언 머피를 낙점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본다.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리부트> 이후 <인셉션> <됭케르크> 등 놀란 감독의 대표작에 꾸준히 출연했다.
킬리언 머피가 맡은 배역이 주연은 아니었지만 출연한 작품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의 스캐어 크로 역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복잡한 캐릭터를 가진 악당 토마스 셸비 역을 맡으며 다시금 특유의 '귀티' 넘치는 연기력을 뽐냈다.
킬리언 머피가 쌓아온 이력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려 마녀사냥 당한 오펜하이머와 잘 겹친다. 실제 영화 속 킬리언 머피는 거의 매장면 얼굴을 내밀며 오펜하이머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고뇌를 제대로 표현해 낸다. 이밖에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대배우 케네스 브래너, 이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조쉬 하트넷, 라미 말렉 등 반가운 배우들도 잇달아 등장한다.
왜 오펜하이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