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 이미지
무브먼트
# 남제주군 의귀리, 당시 23세 송순희
상대적으로 고령에다 귀도 먹은 송순희와의 인터뷰는 애를 먹는다. 딸들이 통역 겸 보조 증언자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참 후에야 상황을 인지한 그는 의외로 또렷하게 회고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총에 맞아 죽는 건 차라리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이었다며 송순희는 복잡한 4.3 당시 상황을 들려준다. 군인과 경찰은 물론 한 동네 살던 이웃이 왕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학살에 가담하던 혼란상이 그렇게 재구성된다. 처음엔 어린아이나 부녀자는 안 죽이겠지 하던 기대는 부질없었다. 아이도 죽이고 엄마도 죽이는 인외마경의 풍경 속에서 초반에 야산대의 습격으로 동료를 잃은 원한에 경찰은 무조건 닥치는 대로 다 죽이려 하고 그걸 보다 못한 군인들은 말리는 혼돈이 펼쳐진다.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주는 주먹밥을 아들에게 나눠 먹이던 한계를 초월한 모성애도 부질없이 아들은 엄마가 맞던 매가 빗맞은 상처가 곪아 끝내 죽고 만다. 1년 구형을 받고 자신은 형무소로 가지만 시어머니는 석방되어 다행인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간 시어머니를 경찰이 끌어내 처형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하고 만다. 정작 형무소에서 간수가 혐의를 보고 나서는 어이가 없다며 건의해 조기 석방 대상이 되었다는 후일담과 함께 눈 덮인 무덤 풍경이 배경으로 깔린다.
그는 심지어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들을 잃고 나서 이감된 안동형무소에서 출산했지만 그 아이도 죽고 만다. 그 직후 석방된 송순희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남편 역시 죽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살기 위해서라도 재가하라는 권유로 몇 달 후 혼인해 떠나지만 정작 남편은 살아서 몇 년 후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기구한 체험으로 청춘을 다 보내고 생이별한 경험담을 그는 재혼 후 낳은 딸에게만 평생 들려줬고, 딸은 그 때문에 또 다른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 지독한 경험 때문에 송순희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열린 5.18 진상조사 청문회를 빠지지 않고 전부 다 시청했다고 한다. 1980년 광주가 폭동일 리 없다는 확신과 함께 말이다.
# 표선면 가시리, 당시 20세 김묘생
그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3 당시 일을 말하면 잡혀간다며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해방전후 혼란기에 공부도 해보고 싶었지만 당시 흉흉한 시대 분위기 때문에 배움의 장소인 야학에 갈 수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밤에 처자가 돌아다니는 걸 가족들이 염려했기 때문이다.
앞선 증언자들과 거의 동일한 학살의 체험담이 한참 예열과정을 거쳐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또다시 관객의 귀에는 약탈과 방화와 총살의 광경이 그려진다. 그의 가족을 총으로 쏴죽인 군인들은 김묘생이 산으로 도망가자 쫓아와 죽이려 했다.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는 군인의 총을 움켜쥐고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날 죽이려 하느냐며 악다구니를 질렀다. 예상하지 못한 항변에 당황한 군인은 얼른 숨으라고, 다른 군인들을 피하라며 놓아줬고, 한참 숨어 있다 불타버린 집터로 돌아오니 남자형제들이 이미 그가 죽은 줄 알고 시신을 잿더미 속에서 찾다가 놀랐단다.
그렇게 5명의 전주형무소 여성수감자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왜 잡혀왔는지 혐의라도 추정해보라는 권유에 야산대가 찾아와 식량을 청하길래 간장병에 쌀 2홉을 전해준 게 전부라고 회고한다. 원래 제주는 쌀이 귀한 곳이라 주려 해도 줄 게 그것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체포된 후 그 부역죄는 쌀 몇 가마로 갑자기 늘어난다.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다 때리기도 지친다던 경찰은 전기고문도 수시로 자행했다고 한다. '악질'로 지목 당해 온갖 고문에 당하다 보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쌀 50가마를 공물로 냈다는 '소극적 저항'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온화한 표정이 부조리극 그 자체다. 그런 증언과 함께 오래된 형무소 벽을 따라 을씨년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4.3 수형인명부라는 유일무이한 공식기록의 발견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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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은 공식적인 희생자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의도적인 은폐와 혼란의 극을 달리던 고립된 섬에서의 학살극 관련 기록의 부재가 혼재된 모양새다. 그런 가운데 군사재판으로 전국 10여 곳 형무소로 이감된 2530명의 수형인명부가 사실상 유일한 공식 기록물인 셈이다. 4.3 도민연대는 2013년부터 정부의 책임 있는 조사를 요청했으나 무응답만 거듭될 뿐이었다. 결국 당사자들이 직접 일일이 조사와 공론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자료 수집 끝에 2018년에 전주형무소 위주로 18명의 재심이 청구되었고, 2019년 1월 전원을 대상으로 '공소기각', 즉 무죄판결이 이뤄진다. 시시비비 따질 것도 없이 절차 전부가 불법적이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변호권은 물론 기본적인 재판 절차가 하나도 이뤄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만 이를 위해 당사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다년간의 수고를 생각하면 2차 가해라 해도 모자랄 게 없는 결판이 아닐 수 없다.
공식 기록 집계가 없다 보니 4.3 특별법이 제정되는 전후에도 정작 실종자 조사는 해도 군사재판 기록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채 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던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 기득권층이 4.3을 불편해하고 망각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떠올려보면 이건 방조가 아니라 고의적인 은닉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의 수고가 그런 방관과 음모에 작은 균열을 기어코 만들어낸 셈이다. 영화 속에서 증언된 것처럼 4.3은 그저 끝나고 만 사건이 아니라 과잉된 이념대립을 빌미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처럼 이웃간에 벌어진 골육항쟁이자 그 결과로 인한 갈등이 현재까지 또아리를 튼 채 지역사회 곳곳에 남은 사례이기에, 과거사 청산이 곧 대안적 미래로 연결되는 과제이기에 그 의미와 필요성은 결코 과거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지적 성찰의 한 궁극점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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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감독의 이전 작업들을 몇 편 본 적이 있다. 감독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계에서도 '아카이브' 자료를 잘 이용하고 '파운드 푸티지', 즉 이미 존재하는 개별 영상을 활용해 하나의 주제로 묶어내는 장르의 대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감독의 예전 작업을 흥미롭게 본 입장에서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처음엔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아카이브 자료를 구하려 해도 고의적으로 은폐되거나 파기되는 바람에 남은 게 없는 것이다. 없는 걸 사용할 순 없지 않은가. 어쩌면 미군정 비밀자료로 봉인되어 있을 순 있겠지만 독립다큐멘터리 작가가 접근하기엔 거의 불가능한 출처일 것이다.
그런 제약을 감독은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이어받되 상이한 방법론으로 돌파한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마지막 목소리들을 채록하고, 이미 사라진 과거의 흔적을 대신해 이 모든 것을 말 없이 지켜보고 기억하고 있는 제주의 자연을 증언자로 내세우는 방식이다. 그냥 촬영한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풍경들이 증언과 화학적 결합을 통해 무언의 증인으로 자리를 지킨다. 스크린을 지켜보는 관객은 4.3 재심의 방청객이 된다. 영화 속 재심 공판 결심 법정 전후의 광경은 무척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조성된다. 생존자들의 표정이 조금씩 침묵에서 소리 없는 미소로 번지는 과정을 풀어내기 위한 세심한 배려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 무죄선고가 이뤄지자 그동안 진눈깨비와 거센 바람이 가득하던 제주의 자연은 축사를 보내려는 듯 계절의 변화로 화답한다. 눈에 덮혀 있던 산간 구릉의 돌덩이들은 서서히 눈이 녹아내리며 현무암의 고유한 질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대자연의 푸르름이 영화 내내 최초로 묻어난다. 돌멩이들이 제주라는 공간의 숨은 힘을 상징하고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듯 진실 역시 감춰둘 수 없다는 목소리가 화면 가득 퍼져나간다.
생존자들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4.3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며, 하지만 무엇인가 기록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후대엔 알 수 없지 않겠냐는 염려는 비록 미약하나마 재심 결과로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감독의 카메라는 다년간 이 과정을 함께 역사의 진실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과 함께 치러낸다.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하는 해당 작업은 작가적 야심이 아니라 영화 촬영에 응하는 대신 반드시 육지에서 개봉하길 소망하던 생존자들에 대한 화답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행보다. 역사의 업보를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은폐하려는 자들의 온갖 패악질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을 차지한 검푸른 화강암들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을 소리없는 사자후로 웅변하는 소중한 작업이다.
<작품정보> |
돌들이 말할 때까지 Until the Stones Speak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4.04.17. 개봉│100분│12세 관람가
감독/촬영/편집 김경만
출연 양농옥, 박순석, 박춘옥, 김묘생, 송순희
면접 조사 김영란, 강미경
제작 (주)영화사백호
배급 (주)디스테이션/무브먼트
홍보/마케팅 무브먼트
온라인 마케팅 루미네(주)
포스터 디자인 빛나는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용감한 기러기상
2023 18회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뉴아시안커런츠 부문 공식 초청
2023 18회 제주영화제 제주트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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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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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가는 게 차라리 나았던... 76년 전 제주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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