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단편영화 유니버스>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꿈은 아스라이 멀고 현실은 다급히 차오른다. 꿈 하나만 바라보고 쫓던 사람들의 걸음은 나른해질 수 없다. 잠시 멈추는 동안에 다시 또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 꿈이다. 그렇게 몇 번 실랑이를 벌이고 나면 다리 힘은 풀리고 만다. 놓친 것도 아니고 포기한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평생을 바라보던 대상이 사라진 자리가 얼마나 허전한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그 감정 속에서 앞으로의 선택은 달라진다. 길었던 술래잡기를 마침내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고, 쉽게 떠나지 못하고 다시 내달릴 채비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극 중 이한(이민구 분)은 독립영화 감독이다. 그는 자신이 연출한 세 편의 영화로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해 왔다. 상영회에 참석한 이들이 가끔 졸기도 하고, 상영 후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질문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지만 오늘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상영회가 감독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 명 남짓한 사람, 그리고 작은 카페. 이 조촐한 자리의 행사가 모두 끝나고 이한은 은퇴를 선언한다.
다음 날 그의 집으로 작품을 함께했던 이들이 찾아온다. 자신의 필모 속 작품들에서 연기를 했던 모든 배역의 인물들이다. 이제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그와 지나간 작품 속의 인물들은 방 안에 모여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감독 이한은 자신이 만들어 온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던 이들을 만나 지나온 시간에 대한 책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이제 모른 척하고 싶었던 자리의 마음에 대해서다.
02.
"내가 만든 캐릭터니까 내가 책임져야 되지 않을까?"
영화 <단편영화 유니버스>는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기묘한 이야기다. 이한 감독은 그 경계 위에서 스스로가 자신이 지나온 길에 대해 고백하고 앞으로의 걸음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청춘 모두를 바쳐 영화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던 자신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 영화 전체는 그렇게 그가 지나온 자리를 닮아 있다. 본인도 그 사실을 굳이 숨기거나 각색하고자 하지 않는다. 극 중 독립영화 감독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실제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 감독을 연기하는 인물은 이민구 배우다.) 실제 연출작인 <사라지는 여자> <볼록한 나라> <낯선 자>를 해당 인물의 필모로 설정하는 방식을 통해 허구 위에 현실을 얹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감독이라는 배역은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이한 감독 본인의 분신이자 대리인에 가깝다. 상영회가 끝난 뒤 술에 취해 꿈과 돈 중에 무엇이 중요하냐며 주정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돈이 중요하다고 현실에 가까운 대답을 스스로 내뱉던 장면, 자신이 여기서 그만둬버리면 그동안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불쌍해서 어떡하냐던 대사부터가 시작이다. 홧김은 아니다. 당장 서른을 앞두고 보니 더 이상 이 길을 걸을 자신이 없어졌을 뿐이다. 서른 전에 상업 영화감독도 되고,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닿을 수 없는 꿈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9급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는 게 미래를 위해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전반부의 장면들을 통해 불안한 형태로 동요하던 감독의 마음은 후반부의 한 부분을 지나며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힘들었던 적은 많았어도 불행한 적은 없었다며, 자신의 커리어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던 그 순간에 처음으로 불행함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는 중단과 절연을 선언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고해성사와도 같다.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에 현실의 장벽 아래에서 느꼈던 마음에 대해서다. 이 작품에서 던져지는 말과 행동들 모두가 감독의 변(辯)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