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과 함께 대표적인 민주화 인사 출신이었으나, 1990년 3당 합당을 통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손을 잡고 여권이 됐다. 당시 야권은 김영삼의 결정을 군사정권과 야합한 배신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1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나회 측은 김영삼 정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그래도 이제는 같은 당인데' 정도로 생각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전두환-노태우를 앞에 두고서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적 밤이 없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얼마 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찾아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며 연이어 의미심장한 발언들을 남겼다.
김 대통령은 3월 8일,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의 조찬 독대에서 대뜸 "기무사령관(보안사의 후신)은 언제 바꿀 수 있냐"고 질문했다. 권 장관은 "국군 통수권자가 통수권을 행사하시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답했고, 그러자 김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오늘자로 바꿉니다"라고 전격 선언했다고 한다. 하나회 숙군작업의 시작이었다.
당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전두환이 주도한 하나회의 핵심멤버들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단 4시간 만에 7개의 별(장성)이 떨어졌다. 이후 한 달도 안 되어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도 교체됐다.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진 군핵심 요직의 교체는 모두 하나회 핵심 인사들이 타깃이었다.
마치 007작전처럼 전격적으로 단행된 숙군작업은 정권 내에서도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알고 있었다. 김 대통령은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후 한 측근에게 "어때? 깜짝 놀랐제?"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하나회 멤버들이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전광석화같이 숙군 작업을 단행했다.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군을 동원할 수 있는 하나회 인사들이 또다시 12·12같은 군사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덕룡 당시 정무장관은 "하나회 척결이 흔히들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즉흥적인 깜짝쇼로 진행된 게 아니다"라고 밝히며 김영삼 정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회의 명단을 파악하고 치밀하게 작업을 준비한 것으로 설명했다.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기묘한 사건까지 발생한다. 1993년 4월 2일 서울 동빙고동의 군인아파트 옆에서 하나회 20기에서 36기까지의 회원 명단이 기록된 전단지가 뿌려지는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살포자는 육사 31기 비 하나회 출신 대령인 백아무개씨였다. 이는 군 내부에도 하나회의 전횡과 권력독점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또한 그동안 세간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회의 존재도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다.
문민정부는 당시 90%에 이르는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나회 척결 작업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약 2개월 사이에 무려 60여 명의 장성이 옷을 벗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세력의 반발에 대하여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는 특유의 화법으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하나회 척결 작업은 자연히 이들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조사 여론으로 이어졌다. 하나회에 의하여 탄압받았던 강창성, 정승화, 장태완 등 당시 대표적인 군 주요인사들이 나서서 하나회의 만행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태완 전 사령관은 "주동자는 역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다. 군사반란은 명분없는 사리사욕에 불과하다. 일개 소장들이 자기 명분을 찾는다고 하면 이 군대와 나라가 남아나겠냐"며 군사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선언하며 "12·12를 군사 쿠데타"로 확실하게 규정했다. 신군부의 대표적인 악행인 12·12와 5·18에 대한 재조사도 진행됐다. 전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 신군부세력 38인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됐다.
법정에 서게 된 신군부 세력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회에 대해서도 친목 모임에 불과하다고 변명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반란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하지만 법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늦게나마 반성하고 사죄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형이 인정되고 약 8개월 만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주요 인사들은 모두 특별사면 조치를 받았다. 역사바로세우기는 그렇게 용두사미로 막을 내렸다. 이에 당시 정부는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군인 집단이었던 하나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사면 이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추징금 남부를 거부했다.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안 된다", "숨겨 놓은 게 있는지 마당 가서 파보면 되지 않냐" 등의 반성없는 망언으로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회의 영원한 보스로 남았다. 하나회에게 '영원한 충성'의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전두환 개인에 불과했다.
손영길 장군은 하나회라는 이름이 부정적으로 거론될 때마다 창립멤버로서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그는 "하나회는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회 때문에 호강한 놈들이 있다. 사람이 올라가면서 마음의 때가 낀 것이다. 한마음 뜻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갔다면 왜 욕을 먹고 존경을 못 받겠나"라고 비판하며 깊은 회한을 드러냈다.
손영길은 2011년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요청하여 38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 5억을 모두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부했다. 후배들이 자신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고 군인으로서의 초심을 지키기를 바라는 선배의 마음이었다.
하나회는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조직이었을까. 아니면 변질이 된 게 나쁜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회 회원들에게는 한때 인생의 황금같은 기회를 열어준 '로또'였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평가는 그들을 '오점'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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