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
인디그라운드
01.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
한국 / 2022 / 15분 47초
감독 : 유우일
출연 : 이양희, 임인정
흑백영화가 주는 특유의 감성, 영화사 초창기에서나 볼법했을 어색하고 간지러운 연기, 올드하고 둔탁한 컷 전환과 배우들의 문어체 화법까지. 이 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의 이질적인 면모를 이야기하자면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구성이나 형식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손을 잡는 것마저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부부의 모습이나 대화를 구성하고 있는 요청과 수용의 일방적인 구조 역시 지금의 다른 영화들이 갖고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의도적으로 다른 형식을 빌려왔다면 그 목적은 명확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상당 부분 감독의 뜻에 따라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금 더 나아간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관객과의 경계에서도 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은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다방을 찾은 영길(이양희 분)과 정희(임인정 분) 부부의 대화로만 구성된다. 처음 화면이 비추는 공간 역시 두 잔의 커피가 놓인 테이블 하나,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뿐이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이야기했던 독특한 장치들과 두 인물, 이 좁은 공간 하나가 영화의 전부와도 같다. 다만 이 작고 유난한 세계는 자신이 향하고자 했던 자리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히 걷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제법 화목하다.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말투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 말투를 닮아 있다. 이제 곧 은퇴를 앞둔 남편의 지난 시간과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아내의 모습은 조금 더 그렇다. 한 해에도 50번이 넘게 배를 타고 일본을 오고 가며 가정을 위해 노력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따뜻할 것 같던 부부의 대화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오래 그렇다고 믿어왔던 상대에 대한 정보와 믿음은 단숨에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서로가 이해하지 못할 우리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를 뱉기 시작한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화면은 의도적으로 갈라놓음으로 각각의 화면 속에 격리시킨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공간은 더욱 협소해진다. 대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남자의 나지막한 대사와 함께 그의 시선이 다른 공간을 향하기 시작한다.
"난 속인 적도 없고 숨긴 적도 없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거지."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로부터 카메라가 시선을 떼는 순간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영화 속 유이한 인물이었던 두 사람 영길과 정희의 대화가 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만 몰두되어 있던 관객들의 집중이 일제히 환기되어 버린다. 강제된 환기를 원하는 감독의 의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관객은 없다. 앞서 하나하나 설명했던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장치, 철저히 계산된 손짓에 모든 감각을 빼앗겨 있었기에 영길의 시선이 머무는 화면, 그 너머에 마련된 장면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다.
감각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상실, 그로 인한 인간의 한계를 유우일 감독은 화면 속 박영길 씨를 통해 적나라하게 경험하도록 만든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이 영화의 목적이자 다다르고자 했던 자리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가. 그곳에는 아무런 의미도 놓여 있지 않을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