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본문듣기

무너지는 공교육, 26년 차 교사가 쓴 반성문

[당신에게 힘이 될 콘텐츠]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4.02.11 18:52최종업데이트24.02.11 18:52
원고료로 응원
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월, 설입니다. 가족과 친지를 만나 정을 나누어도 모자랄 시간이지만, 올해는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경기는 어렵고 들려오는 뉴스도 팍팍한 소식 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라앉아 있을 필요는 없겠죠? 안팎으로 지친 당신에게 단비가 될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난민 문제를 소재로 한 '인생 책 같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듯,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 한 편 역시 누군가에게 삶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어서 더 감동적이고, 감독이 '칸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거장 켄 로치여서 더욱 믿음이 간다.
 
몰상식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벌어지고,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요즘 같은 때엔 더더욱 맞춤한 영화다. 당장 이태 전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도로 들어왔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게 될 듯하다. 해결될 기미조차 없는 대구의 이슬람 사원 건축 분쟁이 겹쳐 보일 수도 있겠다. 실제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만큼 우리의 현실과 비교될 듯하다.

주민들의 쉼터이자 사교의 장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영화사 진진
 
지난달 개봉한 영화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주인공이 일하는 펍(Pub) 이름으로, 직역하면 참나무 고목이라는 뜻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터줏대감처럼 우뚝한, 우리로 치면 당산나무 같은 존재다. 주민들의 쉼터이자 사교의 장이고, 마을의 하나뿐인 공공 공간이며 식당이다. 고목이 쓰러지면 마을도 사라질 것이다.
 
교사라서일까. 그곳이 내겐 자꾸만 학교의 모습과 포개졌다. 주인공 TJ(데이브 터너 분)와 야라(에블라 마리 분)는 교사 같았고, 그곳에 드나드는 주민들은 학생처럼 느껴졌다. '을'이 '을'을 혐오하고 반목하는 그곳을 끝내 화해와 포용의 공간으로 바꿔낸 두 주인공의 헌신적 모습은 내게 죽비였다.
 
장면마다 쏟아지는 주옥같은 대사를 기억하고 메모하느라 혼쭐이 났다. 워낙 전형적인 문구여서 계몽적이고 상투적인 느낌도 없진 않다. 대사는 달랐으나 전하려는 메시지는 일관됐다. 용기를 내어 서로 연대하고, 연대의 힘으로 끊임없이 저항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외엔 방법이 없다는 것.
 
엔딩 장면의 짙은 여운에 용기와 연대, 저항이라는 세 단어를 종일 곱씹게 된다. 그때마다 왠지 모를 힘이 솟구쳤다. 악전고투 속에 천군만마의 우군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며 고개를 떨구기보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신발 끈을 동여맸다. '대천명(待天命)'하기 전에 '진인사(盡人事)'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다.
 
영화 속 TJ의 삶을 본보기 삼게 된다. 아버지의 사고사와 아내와의 이혼, 게다가 생명의 은인이자 분신과도 같았던 반려견 마라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숱한 상처를 견뎌내며 그가 기꺼이 난민들의 기댈 언덕이 돼주는 모습은 자못 뭉클하다. 국가와 종교, 문화와 관습 등 그 어떤 굴레도 휴머니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잉글랜드 북부의 폐광된 소도시가 배경이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전 세계를 범주로 한다. 국가를 막론하고 지금 이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가치가 약자와의 연대에 기반한 휴머니즘이라는 사실을 명토 박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 등 켄 로치 감독의 수많은 전작에서도 드러난 일관된 메시지다.

붕괴하는 공교육에 무력감을 느낀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영화사 진진
 
영화는 무력감에 허덕여온 내 삶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교직 생활 26년째, 요즘 들어 교단에 서는 게 부쩍 힘에 부친다. 교사로서 '효능감'이 곤두박질치고 있어서다. 시나브로 붕괴해 가는 공교육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이따금 퇴직 연금을 계산하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다.
 
1년 365일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았지만, 학교생활은 나날이 삭막해져만 간다. 교육이라는 톱니바퀴가 헛돌고 있다는 뜻이다. 초중고 교육과정이 대입에 철저히 종속되어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다. 항상 아이들 편에 서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들을 살인적인 경쟁으로 내모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의 입에서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무시로 튀어나온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끝없는 경쟁이야말로 인류의 문명을 태동하고 발전시킨 핵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마치 생존의 원리이자 삶의 지혜인 양 여기는 살벌한 세상이 됐다.
 
아이들은 기준과 절차가 공정하기만 하면 경쟁은 '절대 선'이라고 믿는다. 경쟁이 없는 사회란 말 그대로 유토피아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가 패배한 다수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는 건 지당하며, 결과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지질한 패배자의 뒤끝이라고 여긴다.
 
학벌 구조는 아이들이 물구나무선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온상이다. 이를 학교는 방치했고, 사회는 부추겼다. 이젠 교사가 아무리 공동체적 가치와 도덕적 삶을 강조해도 아이들은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행태는 형해화한 교육의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사로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요즘 아이들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커녕 가정 형편 탓에 힘들어하는 반 친구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다. '지잡대', '지균충', '휴거', '개근 거지', '이백충', '맘충' 등 혐오 표현의 발원지도 기실 아이들이다.
 
이들 혐오 표현의 의미는 차마 이곳에 옮기지 못하겠다. 하나같이 지방과 소외, 가난 등을 희화화한 것들이다. 장애인을 비하하고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와 여성 등을 조롱하는 건, 요즘 아이들 사이에선 혐오 표현 축에도 끼지 못한다. 혐오는 늘 약자들을 향하고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영락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이미 우리나라 산업 구조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땡볕에 피부가 그을리기만 해도 "외노자 같다"거나 "다문화냐?"며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다. 무슬림 유학생에 대한 편견 또한 위험 수준에 다다랐다. 하물며 영화에서처럼 이웃에 난민들이 모여 살게 됐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문제는 혐오 표현마다 나름의 논리와 흥미 요소까지 내포된 까닭에 웬만해선 그들의 인식을 바꿔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적할라치면 순식간에 찬반 토론의 장이 펼쳐지기 일쑤고, '예능'을 '다큐'로 받는다며 교사조차 '진지충'으로 내몰린다. 그들 사이에선 혐오 표현에 거침없는 아이가 '상남자'다.
 
끝없는 경쟁이 각자도생의 가치관을 내면화시켰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온갖 혐오 표현을 양산하며 야만적 사회에 빠르게 길들어졌다. 이젠 교사마다 웬만한 혐오 표현은 못 들은 척 외면하고, 여교사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조차 아예 삼간다. 문제 삼아 봐야 학교 안팎이 시끄러워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지.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약자만 비난하고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주민과 난민 중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는 수십 년 지기의 말에 대한 주인공 TJ의 대답이다. 그런 TJ 곁에는 사진가를 꿈꾸는 난민 소녀 야라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다. 상처투성이인 그들은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그들의 연대를 가로막지 못한다. 야라는 실의에 빠진 TJ를 이렇게 다독인다.
 
"용기가 있어야 희망을 품고, 희망은 믿음 위에 생겨요."
 
영화 속 대사일지언정 TJ와 야라의 말에 무력감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교직 생활이 아무리 버거워도 현실 속 TJ와 야라만큼 힘들 리 없다. 용기 내어 연대하고, 그 힘으로 퇴행에 맞서 저항하겠다고 다짐한다.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가 자연스럽게 '의역'되는 건 나뿐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나의올드오크 켄로치 난민문제 혐오표현 무한경쟁각자도생
댓글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