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사건은 1945년 8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망하며 한반도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약 일주일 만이었다. 일본의 북단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오미나토항구에서는 조선인들을 위한 귀국선이 만들어졌다.
일본 해군은 고향으로 보내주겠다며 아오모리현 일대에 거주하던 한국인(조선인)들을 모집했다. 심지어 '뱃삯은 공짜'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덧붙였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수천여명의 한국인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항구에 집결했다. 그중에는 전영택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택씨는 승선을 앞두고 수상한 정황을 목격했다. 같이 일했던 작업반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배가 위험하니 타지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택씨는 결국 배에 승선했고 어마어마하게 몰린 인파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국선의 이름은 우키시마호, 한자로는 '부도환(浮島丸)'이라고 쓰며 '떠다니는 섬처럼 큰 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4730톤급의 우키시마호는 2200명의 승객을 태우고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유명한 타이타닉호와 비교하면 10분의 1 정도의 크기였지만, 탑승객은 확인된 숫자만 타이타닉호의 두 배에 가까운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 해군 승조원 255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3700여 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객실은 일본군들이 차지했고, 한국인들은 2, 3층 선창 맨바닥의 덥고 비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몰려있어야 했다. 예상 항해 기간은 4일이었고, 8월 25일 아침에는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국인 승객들은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출항한 지 3일이 지난 8월 24일 오후 5시, 탑승자들은 육지에서 일본 주택들이 목격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직도 일본 연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배가 도착한 곳은 부산이 아닌 일본의 마이주르만이라는 지역이었다.
탑승객들이 이상한 정황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우키시마호는 항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육지와의 거리를 불과 500미터 앞두고 속도가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 수백 명은 바다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또한 갑판 아래 선실마다 수천 명이 들어차있던 탑승객들은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오기 위하여 아우성을 쳤지만 선체는 점점 더 기울었고 배 아래쪽에선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서로 밀치고 떨어지면서 배 안은 순식간에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한 생지옥이 펼쳐졌다.
"바다 밑을 보니까 기름이 터져서 새까맣게 있고 사람들이 막 빠져서 꼭 미꾸라지 소굴처럼 그렇더라.", "죽어서 자빠지는 사람도 있지, 팔딱팔딱 하며 살려달라 소리지르는 사람도 있지. 얼굴이 흉측해서 사람 같지도 않고 형편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생존자들이 목격한 당시의 참상이다.
다행히 인근마을에서 주민들이 해군의 구조요청 신호를 듣고 고깃배를 몰고 달려왔다. 갑판에서 버티고 있던 최억조씨의 일곱식구와 전영택씨 등은 구조를 받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하여 바다에 뛰어내린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사고 지점은 육지에서 가까웠기에 수심이 깊지는 않았다. 배가 완전히 침몰한 후에도 이렇게 돛대 부분이 계속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헤엄쳐 나오거나 어민들이 구조해낸 사람들보다 안타깝게도 희생자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사고 일주일 만에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하나 둘 해안가로 떠밀려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악스럽게도 일본 측은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 확인도,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었다. 생존자들은 일본인들이 "시신을 새끼줄을 가지고 목을 줄줄 엮어서 끌어갔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전했다. 시신은 기름에 덮어 씌워서 누가 누군지 절대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닷가엔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