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스틸컷
넷플릭스
<선산>은 윤서하와 180도로 다른 인물을 내세워 선산을 둘러싼 갈등을 부각한다. 그녀의 반대편에는 이복동생 김영호가 위치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졌고, 존재가 지워진 채로 지냈다. 이복 누나가 자기 존재를 전혀 모르고, 경찰조차 그를 선산의 상속자로 고려조차 안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선산에 오히려 더 집착하고, 윤서하를 위협한다. 그에게 선산은 온전한 가족의 일원으로 마침내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선산>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선산을 두고 벌이는 암투를 담아낸 드라마가 아니다. 그보다는 선산을 지렛대 삼아 가족의 공동체적 의미를 고찰하려는 이야기에 가깝다. 가족을 대하는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인 태도의 충돌을 선산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는 두 이복 남매와는 접점이 없는 최성준의 가족 이야기에 꽤 많은 분량이 부여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일에 치여서 가족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가 갑작스레 쓰러져서 죽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했고, 비극의 원인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그 결과 아들은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했고, 아버지는 아들과 의절하며 가족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성준은 윤서하 사건을 수사하면서 변한다. 가족 관계에 완전히 무관심한 윤서하, 이복 누나와 선산에게 집착하는 김영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들과의 관계를 되짚는다.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 관점 사이에서 어떻게 가족 관계를 재건할지, 한 번 끊어 버렸던 혈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한다. 이는 윤서하가 종국에 김영호와 연락을 안 한다고 해서 관계를 아예 끊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대사와도 상통하는 모습이다.
내용과 장르의 괴리
이렇게만 보면 <선산>은 가족 드라마로서 흥미로운 작품 같다. 확실한 지향점과 메시지를 갖췄으므로. 반면에 장르적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포스터나 예고편을 보고 키운 기대를 드라마가 배신하기 때문. <선산>은 중반부까지 오컬트 분위기를 유지한다. 김영호가 무언가에 빙의된 건지, 아니면 무당에게 조종 당하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삼재 부적, 굿하는 스님의 존재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철저히 숨겼던 윤서하와 김영호의 진짜 관계가 비로소 수면 위에 올라오면서 오컬트 분위기가 일시에 가족 드라마, 더 나아가서는 막장 드라마로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암시나 복선도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선산>이 일반적인 스릴러라면 이는 나름 효과적인 반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산>이 애초에 오컬트 작품으로 포지셔닝했기에 이 반전은 악수로 작용한다. 오컬트 요소를 배제하는 순간 평범한 한국 드라마 중 하나일 뿐이니까. 초자연적 존재의 정체를 헷갈리게 하며 마지막까지 서스펜스를 유지한 <곡성>이나 <잠> 등의 작품과 다른 길을 간 대가를 치르고 만다.
선택과 집중의 부재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만듦새에도 군더더기가 있다. 윤서하가 대학교 시간강사로서 난관에 빠지고, 최성준과 박상민이 갈등을 빚는 플롯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서하가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도록 유도하고, 최성준의 가족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초반부에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활용하면 충분할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이 플롯은 중요도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 중후반부에도 거듭 등장하면서 존재감이 커지고, 그 결과 중심 갈등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더해 설명조 대사도 너무 많다. 보여주기만 해도 되는 순간에 굳이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한다. 자연히 흐름은 순간적으로 끊기고, 극은 늘어진다.
그 결과 연상호 감독의 일보 전진은 제자리걸음으로 귀결된다. 장르물의 본질적인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함정에 <선산>이 또 한 번 빠져 버렸기 때문. 단순한 신파를 깊이 있는 가족 드라마로 풀어내고, 초자연적 소재라는 성공 공식을 버무리는 변화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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