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럽 제로> 스틸 이미지
판씨네마㈜
미스 노백은 전형적인 '확신범'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식이요법 외에는 다른 도락도, 인간관계도 전혀 없어 보인다. 외톨이인 것이다. 그래서 노백은 각자 마음의 공백을 감추고 있던 소수의 제자들을 훤하게 꿰뚫어 볼 수 있다. 물질적 풍요로만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을 노백은 한눈에 알아보고 부모와 학교가 직무 유기하는 틈을 후벼낸다. 의지할 곳 없는 프레드가 가장 먼저 노백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만 봐도 노백의 비합리적 학설이 먹혀드는 건 기존 가족과 사회가 방치한 허점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제자들처럼 제대로 부모나 학교의 돌봄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강렬한 불신과 분노를 품고 있는 존재다. 그는 이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랬던 것처럼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동화와는 달리 노백의 논리와 주장에는 유럽사회가 20세기 전반을 지나면서 겪었던 세대갈등과 문화충돌의 기운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과 그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막지 못한, 파시즘 전체주의에 경도되어 오히려 방조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참한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렇게 존경심이라곤 상실한 청년세대가 기존의 모든 질서와 문화에 대항하던 '반-문화' 현상을 <클럽 제로> 속 미스 노백과 그의 수업을 듣는 제자들이 우화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봐도 이 영화는 하등 무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서 노백과 제자들의 그룹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관객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양할 테다. 누군가는 68세대 중 극단화된 그룹의 자멸적 흐름, 흔히 '적군파'라 불리던 이들의 테러리즘 추구를 떠올릴 테고, 다른 누군가는 일종의 '컬트'화된 사이비 공동체 혹은 초소형 이단에 가깝다고 평가할 것이다. 채식과 절식을 혼합해 검증되지 않은 식이요법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지점에서 어떤 이는 채식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비합리적 투쟁을 예방하기 위한 고민을 던지는 영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사실상 섭식장애, 즉 거식증 상태로 떨어진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선 해당 증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기보다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렇다는 투의 몰이해가 남아 있지만,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해당 증상이 거의 최초로 목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세속의 물질을 멀리 하려는 이들이 중세 말 교회의 세속화 및 타락 가운데 반작용처럼 유행했고 채식주의를 뛰어넘는 무모한 도전이 이어졌다. 그중 '성녀'로 치성된 시에나의 '카타리나' 경우는 16살부터 빵과 물과 생야채만 먹었고, 23살부터는 성체 빵과 냉수만 먹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금식하는 걸 알고 방해할까봐 식사를 남들과 함께 한 뒤 쓴 풀을 뭉친 경단을 씹어 토해냈다고 한다. 그 결과 33살에는 아무것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 죽음을 맞았다. 이 과정은 <클럽 제로> 중반부 이후 고스란히 등장인물들에게 닥친다.
그런 영화 속 인물들의 금식은 부모나 학교에 대한 '단식투쟁' 성격도 강렬하게 지닌다. 미스 노백은 계속 제자들에게 기성사회의 강요와 부모의 통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아이들 역시 규격화된 기성품처럼 자신들을 찍어내려는 부모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부모에게 물질적 자원을 의존해야 할 아이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자신들의 신체와 건강뿐이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자면 <클럽 제로> 속 캐릭터들의 말도 안 되는 행태는 정치적 단식투쟁과 본질적으로 잇닿아 있는 셈이다.
물론 그들의 '투쟁'은 합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사회적 체험이 결여된 채다. 하기에 결국 독립된 주체로 성장하지 못한 채 노백의 선동을 전적으로 수용해 파국으로 치닫고 말 운명이다.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 해도 그들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부모세대의 모든 걸 증오하며 거부하는, 그저 역편향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아이들의 극단화에 감정적 개입 대신 건조한 관찰자의 시선과 이를 떠받치는 화사해 보이지만 차가운 색조 이미지, 그리고 불길한 기운이 서린 최소화된 불협화음의 사운드트랙으로 채워진 배경을 덧붙여 완성한다. 그렇게 겉으로만 풍요로운 서구의 유토피아는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종말론적 우화로 <클럽 제로>는 종결된다. 21세기에 부모의 역할, 학교의 책임, 교육제도와 사회구조의 위기를 가득 버무려낸 그로테스크한 뒷맛으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돌아왔다. 한국사회의 작금 현실에도 찰떡궁합으로 고민을 던지는 영화다.
<작품정보>
클럽 제로 Club Zero
2023|오스트리아|미스터리/스릴러
2024.01.24.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주연 미아 와시코브스카(미스 노백 역)
출연 루크 바커(프레드 역), 플로렌스 베이커(라그나 역),
크세니아 데브리엔트(엘사 역), 사무엘 D. 앤더슨(벤 역)
수입/배급 판씨네마㈜
2023 76회 칸 영화제 본선경쟁 초청
2023 36회 유럽 아카데미 음악상
2023 56회 시체스 영화제 음악상
2023 30회 유로피안 영화제 특별언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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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