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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활동가가 된 엄마를 카메라에 담는 딸

[리뷰] 다큐멘터리 <어쩌다 활동가> (2021, 박마리솔 감독)

23.12.21 11:07최종업데이트23.12.2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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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을 스크린을 통해 보니 신기했다. 그것도 영화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니 더 그랬다. 지인(이윤정)이 출연하고 그의 딸(박마리솔)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기에 응원차 간 영화 관람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풋'하는 웃음보를 여러 번 터뜨리며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어쩌다 활동가>는 현재 이주민 인권 단체 '마중'의 활동가 이윤정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를 아는 사람은 제목이 제격이라고 생각할 테다. 그렇다고 그의 '어쩌다'가 '아무렇게나'나 '대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활동가 하면 일견 거룩한 신념의 소유자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며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신념을 거창하게 내세우지 않으면 덜 지치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투철한 신념으로 시작했고 정진한다면 가열찬 운동으로 확장할 수는 있겠지만, 신념이 활동가를 시험에 들게 할 때, 높은 확률로 미끄러지기 쉽다. 미끄러진 곳에서는 의심이 환멸을 먹고 자라난다. 발아된 의심은 나를 의심하고 동료를 의심하고 활동 자체의 환멸로 이어져 결국 그 판과 이별하게 한다.

같은 말, 다른 의미 '봉사'
 
 다큐멘터리 <어쩌다 활동가> 스틸 이미지.
다큐멘터리 <어쩌다 활동가> 스틸 이미지.(주)시네마달
 
내가 아는 몇몇 직업(전업) 활동가들은 적지만 보수를 받고 활동한다. 그들에겐 활동이 곧 직업이고 직업이 곧 활동이다. 누구나 먹고살기는 해야 하니 보수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보수는 결국 활동의 대가로 치환되기 마련이기에, 노력에 비해 너무 적다고 느끼면 활동을 접을 이유가 되거나 적게 받으니 그만큼만 하겠다는 관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일의 대가인 보수로 보자면 이윤정은, 얼마를 받든 활동상에 비해 매우 적거나 거의 무보수일 것이다. 그의 이런 봉사에 가까운 활동은 가족들에게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의구심을 낳는다. 활동의 이유를 묻는 딸에게 "그냥", "봉사"라고 에두른 것은 누구(세상)로부터의 인정이나 돈으로부터의 인정과 애초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여름 돌봄 관련 강연에 갔을 때다. 요양보호사 선생님 두 분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문제의식을 나누어 주는 자리였다. 요양원에서 장기 근무하다 회전근개 파열로 요양 중인 한 선생님은 요양보호사의 덕목으로 무엇을 꼽겠느냐는 질문에 봉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임 참가자 중 한 분이 봉사라는 말의 남용과 착취성을 문제 삼았다. 나는 그의 반론에 찬성한다. 하지만 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쓴 봉사와 문제를 지적한 분이 말한 '봉사'가 말은 같으나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에겐 취약한 사람을 연민과 호혜의 마음으로 돌보는 기꺼움이나 자발성이 봉사였을 것이다. 선생님에겐 자신의 행위성을 포괄할 언어가 봉사 외 달리 없었을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윤정의 봉사도 무조건적 노동 착취나 자기만족으로 귀결되는 기만적 쾌락과는 엄격히 다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성을 적확하고 멋지게 언어화한다면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한 능력은 아니다. 물론 언어를 찾는 일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힘이기에 매우 뜻깊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행위의 맥락을 제거하고 채택된 언어만을 문제 삼아서는 언어의 의도를 왜곡하게 된다. 백 마디 말보다 백 번의 행위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 언어가 늘 자기 해석의 무기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그의 봉사는 어디에서 발원했을까. 그는 열 살부터 교회를 다녔고 그곳에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환대와 헌신을 습득했고 행했다. "하느님이 사랑하심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을 대행했다. 그가 자신의 활동을 봉사, 박애 등의 대가 없음으로 의미화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인인 그는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그가 다닌 교회에서 하느님의 뜻이 배신되는 것을 목격한 이후다. 거의 평생을 몸담은 곳을 떠나는 결행은 쉬운 마음이 아니다. 하지만 배신당한 마음의 곳곳을 후벼 파내 끄집어낸 질문을 모조리 던진 후라면 머뭇거려선 안 된다. 그는 교회를 떠났다. 
 
나는 그가 교회와 '헤어질 결심'을 한 그 순간부터 '어쩌다' 활동가성이 본격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며칠 전 몹시 추운 날에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을 멈추라고 외치는 집회장에 있었다. 교회와는 이별했지만 하느님과는 가까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활동가성을 종교적으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기승전 하느님의 뜻으로 귀결된다면 '어쩌다'는 하느님만의 성취가 된다. 그럴 리 없다. 그를 각성시키고 성장시킨 것엔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를 관여시킨 여러 동인(사회적, 가족적, 개인 역사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놀라운 사건(장면)을 목도하거나 낯선 사람과 마주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바로 잊고 어떤 사람은 잠깐 괴로워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장면, 그 사람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사건 그 인물이 가슴에 와 대못으로 박혔기 때문이다. 가슴에 못질 된 사건이나 사람을 뽑아내는 건 어렵고 위험하다.

못을 뽑는 상실과 고통 대신 박힌 못과 살아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못을 만나고 못에 개입한다. 영악한 사람들은 못과 사는 일 즉 돈이 안 되고 명예도 안 되는 일을 얕잡아보고 함부로 재단한다. 그런 사람들은 보이는 사람으로 자신이 누리며 살아온 게 특권이라는 것을 모른다. 때로 무지는 무기다.

모녀 서사로의 변주
 
 다큐멘터라 <어쩌다 활동가> 스틸 이미지.
다큐멘터라 <어쩌다 활동가> 스틸 이미지.(주)시네마달
 
이윤정을 빤히 들여다보던 카메라는 점차 이 영화의 감독이자 딸인 박마리솔로 잠깐씩 곁눈질을 한다. 박마리솔이 엄마의 딸에서 연대자로 변화되는 전개는 과하지 않은 감동을 준다. 엄마와 딸의 연대기로서 혹은 딸이 엄마를 알아가는 참여 기록으로서, 관람자의 엄마 또는 딸 혹은 사회적 모성과 딸의 이야기로 옮아가 다채로운 모녀 서사로 변주될 것을 기대하게 한다.
 
엄마와 딸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관계가 아니다. 자연스러움은 사회가 고안한 모성이라는 성 역할을 자연이라 강요하고 희생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당연함을 증거하기 위해 모성은 욕심도 욕구도 욕망도 없는 존재로 믿어졌다. 그런데 문득 카메라가 끌어당겨 찍은 앨범 속 사진은 이윤정이 호기심 많은 아기였다, 활달한 소녀였다, 어른의 세계를 넘보는 여자였다고 말한다. 지금의 이윤정을 상상하기 힘든 사진들은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균질한 얼굴로 고착화되기 전 그가 역사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한다. 딸인 박마리솔의 카메라가 아는 엄마에서, 점차 모르겠는 엄마, 마침내 자신의 세계에 오롯한 제3지대의 엄마로 이행하는 것은 탈 역사화된 엄마가 복원되는 과정과 맞닿는다.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의 저자 재일조선인 양영희씨는 "재일코리안을 둘러싼 일본 상황이 악몽 같아" 부모가 불려준 조선인이라는 유산을 상속하기 괴로웠다. 그런 그가 카메라를 들고 부모를 관찰기록하면서 우연히 툭툭 불거져 나오는 부모의 대화를 통해 자기가 알고 있는 가족사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북조선에 아들 둘을 보내고 부모가 겪은 한탄의 날들과 제주 4.3에서 엄마가 가족의 학살을 목격한 후 평생 "절대 들키면 안 돼"라는 주문을 온 몸에 새긴 흔적들을 더듬는다. 그는 부모를 찍으며 "가족과 마주하기"라는 피하고 싶었던 역사를 직면했다. 카메라는 찍는 사람이 보는 것 이상을 보게 했다.
 
'어쩌다' 연말이다. 화기애애가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전멸한 빙하기다. 이 무서운 시기를 넘기는데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 외 다른 최선이 있을까. <어쩌다 활동가>가 걸어오는 다정한 말 걸기와 함께 하는 것도 좋겠다. 독자 모두의 다정한 연말을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어쩌다활동가 박마리솔감독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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