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강조의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 요나라가 고려 내의 반거란 세력을 직접 제거했다는 것은 쿠데타 이전의 천추태후 정권이 거란에 우호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천추태후 정권의 그 같은 외교노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나라 성종시대 역사서인 <요사> 성종본기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음력으로 통화(統和) 20년 7월의 사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축일, 고려가 사신을 보내 본국의 지리도를 헌납했다"고 말한다. 양력 1002년 8월 18일 고려 사신이 자국 영토를 그린 지도를 갖고 와서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시절에는 지도가 극비 문서였다. 정확한 지도를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승률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지도를 상대국에 제공하는 것은 '귀국을 믿는다'는 표시였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이런 방법으로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로 두 사람 집권기에는 거란과 사이가 좋았다.
그렇다고 천추태후 정권이 정통 중국 왕조인 송나라(북송)을 완전히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천추태후 정권은 요나라와의 관계에 좀더 무게를 실으면서도 송나라와의 관계 역시 훼손하지 않는 절묘한 균형외교를 추구했다.
천추태후 집권 이전인 993년에 요나라는 고려를 침공했다. 이 침공을 외교술로 물리친 이가 서희였다. 서희의 활약에 힘입어 고려는 여진족 땅인 압록강 주변 280리 땅에 대한 우선권을 획득한 뒤, 요나라의 묵인 하에 이를 강동 6주로 편입시켰다. 대신, 고려는 송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고 요나라의 책봉을 받기로 약속했다. 신하국이 조공하면 황제국은 답례로 회사(回賜)를 하는 관계도 송나라가 아닌 요나라와 맺기로 합의했다.
이로부터 4년 뒤에 출범한 것이 천추태후-김치양 정권이다. 이 정권은 요나라와의 동맹에만 올인하지 않고 북송과의 동맹 가능성에도 문을 열어놓았다. 이를 알려주는 기록이 <고려사> 목종세가에 있다. 이에 따르면, 음력으로 목종 2년 10월(양력 11.11~12.10)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이부시랑 주인소를 파견해 송에 가게 했다. 황제가 따로 불러 접견했다. 인소는 나라 사람들이 화풍(華風)을 사모하고 있으며 거란에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천추태후 정권은 요나라와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윙크'를 했다. 우리는 여전히 중국 문화를 사모하고 있으며, 요나라와 동맹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당장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송나라 조정이 이것이 이중 전략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를 통해 송나라는 고려가 자국과의 관계를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요나라의 제1차 고려 침공은 993년, 제2차 고려 침공은 1010년에 있었다. 천추태후 정권은 997년에 출범해 1009년에 붕괴했다. 균형외교가 작동하는 동안은 고려의 국경이 평화로웠던 것이다. 균형외교가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사례에서도 명확해진다.
강조는 충성스런 고려인이었다. 칼로 베임을 당하면서도 요나라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런 의리는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그가 전쟁을 막는 지혜가 부족했다는 점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는 전임 정권인 천추태후의 균형외교를 깨트렸고, 요나라를 안심시킬 만한 외교적 카드를 내놓지 못했다. 이는 1010년에 거란 황제가 강조를 잡으러 직접 출동하는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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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