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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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행적과 일상을 보면서 드는 기분은 마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고충이 이해되는 심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징비록, 그리고 난중일기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중시한 조선시대 인물인데다 국난을 수습하는데 일등공신이다 보니 충무공에 대한 기록은 근대 이전 인물치고는 상당한 수준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한국 역사 최고위인 중 일인이기에 수많은 후대 연구자들이 뭐 하나 건져볼 것 있나 해서 먼지를 털듯 온갖 경로로 자료를 조사하는 건 현재진행형이다.
문제는 아무리 충무공 관련 기록을 파고 또 파 봐도 자식을 잃거나 노모를 떠나보내거나 할 때 토로하는 인간적 고뇌 외에는 흠집 잡힐 게 없다는 딜레마다. 너무 인격과 품행이 훌륭해서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장하 선생의 공로를 간증하는 이들이 워낙 사방에 가득하다 보니 선생이 충무공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기록영화에서 관객이 내용에 몰입하기 위해선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는 문제다. 간신히 선생의 신용을 조금씩 획득하기 시작한 김주완은 (비록 처음 기대했던 밀착 인터뷰 기회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세상이 선생에 대해 품어온 의구심과 그가 지난 시간 겪었던 고초에 대해 일정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된다.
사재를 털어 지역에서 꽤 명문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전교조 대량해직 사태에 직면해 교육부의 해고 종용을 거부하면서 겪었던 고난은 과거의 추억이 되긴 했지만 숱한 억측을 낳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마 보는 이들을 가장 충격에 빠트릴 순간이 찾아온다. 익명의 상대가 선생을 향해 전화로 내뱉는 험담과 위협은 주인공의 선의를 믿게 된 이들에겐 가공할 폭력이자 몸서리쳐지는 한국사회의 타락한 민낯이다. 선생 역시 그 무례한 상대에게 지극히 절제되긴 했지만 결코 호의적일 수 없다. 아! 저 분도 사람이 맞구나 싶게 해주는 터닝 포인트 격인 순간이다. 선행을 거듭 쌓아왔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이들에겐 선생의 행적이 고깝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단화되고 진영논리에 편향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생생한 확증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이제 쇠약해져 한약방 운영을 포함해 그간 벌여온 활동을 내려놓을 시기가 다가온다. 김주완은 선생의 신화를 파괴할 생각은 없지만 그저 전설 속의 존재로 박제하지 않기 위해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노력을 이어간다. 일평생 부당한 오해와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아온 선생의 삶이 올바른 궤적을 이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선생이 겪었던 수모를 안쓰럽게 지켜봤던 그는 장대한 위업을 증명하는 과정으로 후반부 방향타를 잡는다.
은퇴를 알리는 상징적 찰나인 한약방 마지막 출근에 지인들이 이심전심 모여서 이벤트를 준비하는 순간은 어쩔 수 없이 뭉클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딱 한번 공개적으로 기획한 깜짝 생일잔치 때도 그렇고, 워낙에 주인공이 그런 형식을 싫어하는 걸 잘 알기에 노심초사하며 혹시 불쾌하게 여기시지 않을까 염려하는 풍경은 흐뭇함을 자아낸다. 그렇게 거의 60년간 지속된 지역사회 봉사가 대단원에 이르는 경로에서 그동안 선생이 그저 '사부작사부작' 걸어온 행보가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거대한 풍경화가 완성된다. 관객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말이지만 식상함과는 거리가 먼 마무리이다.
국/영문 제목으로 확인되는 영화의 주제의식
국문제목은 '어른'이 강조된다. 반면에 영문제목은 '도시를 치유하는 남자' 쯤으로 번역이 가능한 작명이다. 국문제목이 감성적이라면 영문제목은 시의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른'이라는 명칭은 (마치 '태극기'가 지난 몇 년간 겪고 있는 위기처럼) 사전적 개념에 갇힌 채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격화된 세대 갈등 속에서 '어른'이란 용어는 자연스럽게 '어른'='꼰대'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이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품고 있었을 테다. 그래서 제목 작명부터 '어른'의 본원적 의미를 부활시키고픈 소망의 발로처럼 다가온다. 후속세대가 보고 배울만한 인생의 스승으로서 '어른'이라 할 만한 표상이 과연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투박하게 여겨지던 국문제목에 담긴 진의와 제작진의 절박함이 확연히 다가온다.
반면, 영문제목은 선생이 일평생 지역사회에서 수행해온 역할과 기능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선생은 자신의 노력과 기회로 얻은 막대한 부를 진주 지역사회에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재분배해 왔다. 단순히 돈이 넘쳐나서 선심성으로 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지역사회가 폐쇄적으로 치닫거나 토호 중심의 작은 사회 한계로 기울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려는, 진정한 공동체주의에 기반을 둔 애향심이다. 기성세대의 토박이 중심주의도, 청년세대의 굳이 지역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해체주의와도 분명히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선생은 특히 교육문제에 관심이 커 학교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생을 선발해 지원해왔다. 유독 인터뷰 상대 중 장학생 비중이 높은 편이다. 성공사례로 자랑스럽게 언급될 이들이 많지만 사회운동에 매진하다 옥고를 치르거나 출가한 이들도 언급된다. 이를 통해 선생의 가치관이 세속적 출세 지향과 확연히 다르다는 분석이 가능해지는 측면도 있다. 그런 대안적 시야가 확인되기에 공공지원의 틈새에 처해진 지역 연극이나 문학, 문화계는 물론 여성인권과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건전한 시민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영역 전반에 대한 전 방위적 조력을 무리 없이 수긍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 홀로 '칼레의 시민' 혹은 '7명의 선인' 몫을 감당해온 셈이다. 지역사회의 숨은 기획자이자 비공식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역할과 위상이다. 그런 일평생 작업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영화 내내 질리도록 확인할 수 있다.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록자 혹은 가이드의 활약
여기에서 그저 김장하 선생의 대단한 업적을 홍보하는 일대기 소개로 그치지 않도록 추진력과 방향설정이 필요하다, 그 동력을 맡을 '엔진' 역할에는 수고를 자청한 김주완의 지분이 크다. 그는 한국사회 민주화와 진보에 헌신해온 어떤 세대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부류임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세대가 느끼는 좌절이나 허무감을 그 역시 갖고 있다. 세상의 모순에 분노하며 이를 바꾸기 위해 다른 이들처럼 세속적 성공과 부를 포기하고, 희생과 헌신을 적잖게 해왔지만 결산해보니 공염불처럼 느껴지는 회한 앞에서 김주완은 자신이 번민에 빠져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특히 자신이 몸담아온 언론 분야에선 비판적인 시선도 조심스럽게 던진다. 선생이 교육사업 다음으로 오래 그리고 많이 지원했던 지역 언론 '진주신문'의 흥망 관련 동료 언론인과의 대담은 그저 미담 수집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과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자신을 향한 질문에 그 또한 '직면'한 것이다. 날이 선 비판으로 그릇된 기존질서에 맞서온 과거 대신에 이제는 다른 경로, 즉 대안공동체와 미래사회를 위한 전망을 찾으려 한다. 그런 전망에 근접한 실천을 묵묵히 한 개인이 구현해낸 경이를 올곧게 소개하고자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마치 관객이 주인공에게 온전하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본인이 비장한 각오로 제대로 가이드 해보겠다고 결의한 모양새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답을 얻거나 위로받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구구절절 해설보다 큰 바위 얼굴을 보는 듯 정감으로 기억될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