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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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1637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켰고 이후 명나라까지 멸망시키며 중원을 차지한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패전의 대가로 국가와 군주의 위상 추락, 후계구도의 혼란, 군사-경제적 부담까지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질서가 흔들리는 대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1월 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4회에서는 '드라마 <연인>으로 본 청의 시작과 병자호란'편을 통하여 조선사 최대의 굴욕으로 여겨지는 병자호란과 청 제국의 탄생 배경을 조명했다. 조영현 고려대 역사교육과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드라마 <연인> <추노>, 영화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올빼미> 등 한국 대중문화에서 조선 인조 시대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중인 MBC 드라마 <연인> 역시 비극적인 시대의 격랑에 휩쓸린 젊은 연인들의 로맨스를 다루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병자호란은 드라마의 서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배경으로 등장하며 전쟁, 포로 납치, 사회적 편견, 정치싸움의 희생양 등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고난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과 누르하치의 성장
청나라의 뿌리는 여진족(만주족)이며 퉁구스계 종족 집단 가운데서도 만주 일부 지방에 살았던 숙신-말갈계의 후손인 유목 민족이었다. 농경 민족 국가인 조선이나, 중국의 한족 왕조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로 부르며 천시했다. 오랑캐는 몽골어 '오랑카이'에서 유래하여 들과 산에서 문명없이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유목인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거대한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이들의 규모는 중원을 지배한 명나라와 비교하면 1/100밖에 되지 않았지만 뛰어난 궁술과 기마술을 갖춘 '전투민족'으로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쳤다. 오늘날 여진족과 청나라 시대하면 떠올리는 트레이드 마크가 된 '변발'도 전투에서 위생과 편의성을 고려하여 앞머리와 정수리를 밀어버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여진족은 흔한 선입견과 달리 유목생활만 했던 것이 아니라 농사를 병행하며 생활했다. 강력한 전투력과 농업을 통한 정착생활의 안정성이라는 두 가지 강점을 모두 갖춘 여진족은 다른 유목민족들에 비하여 빠른 성장을 위한 잠재력을 갖춘 민족이었던 것.
명나라는 이러한 여진족의 성장 경계하여 이이제이(以夷伐夷)를 노선으로 삼아 항상 여진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실제로 여진족은 해서 여진-야인 여진-건주 여진으로 분열되어 오랫동안 잠재력에 비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누르하치가 등장하여 30여 년에 걸쳐 분열된 여진족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동아시아 판도에 일대 태풍을 불러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누르하치의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또다른 사건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여진족 관리를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 사이 힘을 키운 여진족에 차례차례 정복 당하는 비극의 씨앗이 된다.
힘을 키운 누르하치는 결국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누르하치는 독자적인 만주 문자를 만들고 팔기군 제도를 정비하여 철저한 준비를 마친뒤 마침내 명나라를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빠른 기동력의 기마병을 활용하여 명군을 각개격파하며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의 대승을 기점으로 명을 몰아내고 만주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후금군은 기세를 이어 명의 본토를 노렸지만 산해관(山海关)에서 명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주춤한다. 산해관을 지킨 장수는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꼽히던 원숭환(1584-1630)이라는 인물이었고, 당시 최강병기로 꼽힌 화포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앞세어 6배가 넘는 후금군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산해관 공략을 위한 영원성 전투(1626년)에서 명군에 패배한 후 8개월 만에 중원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누르하치의 8남은 홍타이지(청 태종 숭덕제/1592-1643)였다.
'청 실록'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독서를 즐겨 경사에 밝고 전략에 뛰어나며 재능이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홍타이지를 자신의 눈과 같은 존재로 평가하며 유독 총애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즉위하고도 당장 전권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형제들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통치를 해야 했다. 홍타이지로서는 황제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누를 만한 확실한 업적이 필요했다. 아버지 누르하치의 숙원이던 명나라 공략이 산해관에서 막혀 지지부진하던 홍타이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