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는 재가 남지만 물은 흔적도 안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물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수란 비가 많이 와서 하천이 범람하거나 땅이 물에 잠기게 될 정도의 상황을 뜻한다. 한반도에서도 역사적으로 과거 수차례나 대홍수가 발생하며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아야했다.
특히 1984년 서울을 강타했던 대홍수는 막대한 인명피해와 대규모 이재민을 낳으며 우리 사회의 재난 대비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12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1984 서울 대홍수' 편을 통하여 거대한 자연재해에 맞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던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1984년 9월 1일 토요일의 서울, 며칠전부터 계속해서 폭우가 내리고 있었고 당일 오전 6시에는 호우경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현재는 '3시간 강우량이 90mm 이상' 예상될 때 호우경보를 내리지만 1984년에는 '24시간 강우량이 150mm 이상'일 때로 지금보다 호우경보의 기준이 낮았다. 당일은 오전 6시부터 시간당 강우량이 40mm를 넘었고, 이 정도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 수준에 해당한다. 9월이라 장마철도 이미 지난 시간이지만 이례적으로 비가 많이 쏟아진 이유는, 태풍 '준'이 한반도를 지나가면서 비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에 재학 중이던 이호룡씨와 김도준씨는 아침부터 학교 건물이 침수되면서, 순식간에 높이까지 차오른 물을 보고 경악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국립의료원 외과 레지던트 장윤철씨도 폭우로 도로가 침수되면서 차량을 포기해야했고 자택도 물에 잠겨 가족들과 함께 황급히 대피해야했다.
같은 시각, 서울 곳곳에서는 피해가 속출하며 '한강홍수통제소'는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수위를 측정할 때는, 인도교(현 한강대교)의 어디까지 물이 찼는지를 지표로 삼는다. 당일 오후 3시 당시 인도교의 수위는 경계수위(8.5m)를 넘어선 8.62m로 홍수주의보 발령 기준을 넘긴 데 이어, 더 높은 단계 '홍수경보'를 발령할수 있는 위험수위(10.5m)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서울이 물에 잠기고 있는 상황에서 하천을 끼고 있는 망원동, 풍납동, 성내동 지역에 피해가 집중됐다. 40년 전의 서울은 지금보다 반지하 주택이 더 많았고, 배수시설은 더 열악했기 때문이다. 1984년 9월 1일, 서울은 완전히 심각한 재난 상황에 빠져있었다.
여기서 서울의 결정적인 운명을 쥐고 있었던 또다른 키포인트는 바로 춘천의 '소양강 댐'이었다. 사력댐 중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소양강댐은 그 어마어한 수량을 바탕으로 수도권 전 지역에 물과 전기를 공급할 뿐 아니라 '홍수조절'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강 상류에서 물을 가둬둠으로써, 하류인 수도권의 홍수피해를 줄이는 것이 소양강댐의 기능이었다.
그런데 당시 소양감 댐은 8월에만 200m에 이르는 비가 4~5일 동안 지속됐고, 9월 1일 당일에는 하루에 260~270mm 정도의 폭우가 또 더해지며 급격한 수위 상승이 발생했다. 이미 수도권에서 침수 사고가 이어지며 긴장감이 높아지자 소양강 댐을 관리하는 수자원공사 측에서도 전직원이 비상근무를 통하여 물이 넘치지 않도록 수위를 계속 확인해야했을 정도였다.
1984년은 당시 소양강댐이 생긴 지 11년이 된 해였다. 그동안 소양강댐의 수문이 개방된 것은 이전까지 1978년과 1981년 딱 두 번이었고, 그 중 한 번은 언론 공개 행사 때문에 일부러 시험 삼아 열었던 경우였다.
직원들도 '살아 생전에 소양강댐 개방을 또 볼 수 있겠냐'는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수문 개방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만일 소양강댐이 이날 사상 세 번째로 수문을 개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한강으로 흘러간 물은 가뜩이나 물난리가 난 서울에 치명적인 재앙이 더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양강댐의 높이는 해발 203m, 최대 저수량 한계선은 그보다 5m 아래인 198m 높이에 29억 톤이었다. 이는 상암에 있는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600개나 채울 수 있는 양이자, 수도권 시민들이 1년 이상 쓰고도 남을 정도의 물이이었다. 다만 이는 최대치이고 평상시엔 193.5m, 홍수기인 6월에서 9월 사이엔 190.3m까지 제한수위가 더 내려간다.
9월 1일 오후 3시 기준, 소양강댐의 수위는 188.52m로 홍수기의 제한 수위까지 육박할 만큼 물이 차올랐다. 소양강댐의 수위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한강홍수통제소에도 전송되고 있었다. 댐 수문을 열려면, 홍수통제소와의 공조가 필요했다. 홍수통제소 상황실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후 5시, 소양강댐 수위는 189.9m. 홍수기 제한 수위인 190.3m에 불과 40mm 차이까지 육박했다. 수위가 오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며 소양강댐 직원들은 불안감을 커져갔다.
사무소 측은 계속 홍수통제소로 연락하여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알리며 '수문 개방'을 요청했다. 하지만 통제소 측은 위성 데이터를 통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하천에서 수위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확인하고, '서울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소양강댐 방류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라는 지침을 내렸다.
소양강댐이 착공된 건 1967년이었다. 경부고속도로와 지하철 1호선에 이어 박정희 정부의 3대 국책사업중 하나로 진행된 소양강 댐은, 당시만 해도 막대한 비용과 시간 문제로 콘크리트 댐 대신 모래와 자갈로 짓는 사력댐으로 건설했다. 이 사력댐 아이어를 처음 제시한 것이 시공사인 현대건설의 오너인 정주영 회장이었다.
덕분에 소양강댐은 실제로 상당한 비용을 줄이며 완공될 수 있었지만 한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만약 물이 댐 높이를 넘어서면, 물만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댐을 이루는 자갈과 모래도 같이 흘러내린다는 것이었다. 콘크리트 댐은 물이 살짝 넘쳐도 감당이 가능하지만, 사력댐은 넘쳤다 하면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지적한 약점이었다.
서울홍수통제소와 춘천 소양강댐 사무소,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진퇴양난이었다. 댐사무소에서 궁여지책으로 수문 개방 대신 발전기를 돌려 물을 소모시키며 다소 시간을 벌었지만, 그와중에도 소양강댐의 수위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자정이 지나고 다음날인 2일 새벽 1시. 소양강댐의 수위는 193.89m까지 도달하며 홍수기 제한수위를 넘겼고, 최대 한계치인 198m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이 한계수위를 넘어 댐이 붕괴되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대재앙이 벌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수자원공사는 소양강 댐의 안전을, 통제소는 서울 전체의 안전을 생각하다 보니 입장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 2시, 여전히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설상가상 소양강 댐에는 유속을 확인하러 나갔던 직원들이 폭우에 고립된 데다가, 발전소까지 침수되어 물에 잠기는 악재가 겹쳤다. 전기가 나가면 아예 수문을 열고 닫을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일부 직원들은 수동으로 문을 열어야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위쪽에서 대기해야했다.
끝까지 고민하던 통제소는 수위가 194m까지 돌파하자 결국 제한적인 방류 허가를 내렸다. 버튼이 눌리고 수문이 열리며 거대한 폭포가 쏟아지듯이 초당 3600톤에 이르는 새하얀 물줄기가 컴컴한 새벽을 가로질러 밖으로 흘러나왔다. 소양강댐 직원들은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괴로웠다. 당장 댐은 구했지만 한강을 향하여 쏟아져가는 물을 바라보며 담당자인 이순혁 부장은 "마치 지옥의 문을 여는 기분"이라며 딜레마에 빠진 순간을 회상했다.
소양강댐에서 방류된 물이 한강까지 도달하는 데는 16시간 정도가 걸렸다. 새벽 2시가 수문이 개방되었으니 한강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6시 정도였다. 소양강댐이 버텨준 덕분에 시간을 벌었던 서울에서는, 그동안 비가 그치고 인도교 수위가 잡히길 간절히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 무렵 서울 곳곳에서는 큰 재난에 맞서 사람을 도우려는 '의인'들의 활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내동에 거주하던 윤철씨는 군에서 배운 수영 실력을 활용하여 침수지역을 헤엄쳐서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고무보트로 물속에 잠긴 주택가를 돌며 가족들만이 아니라 시민들까지 돕는 구조활동을 폈고 강동구와 강남구 일대 주민 1백여 명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도학교에 재학 중이던 호룡씨와 도준씨도 뗏목을 만들어 인근 시민들을 구조하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곳곳에서 '민간 구조대'의 활약으로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위기를 극복했다.
천만다행으로 오전 8시부터 호우경보가 호우주의보로 하향 조정되며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소식도 발생했다. 새벽 사이 내린 폭우에 지반이 약해지면서 산사태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틀에 걸친 폭우로 사망자가 무려 189명, 실종자는 150명. 재산피해는 2,500억 원에 달했다. 수도권 지역에서 2만 채가 넘는 집이 침수되고, 이재민만 20만 명 넘게 발생하는 가슴아픈 상황이 이어졌다.
한편 방류를 시작한 소양강댐은 다시 비상이 걸렸다. 방류된 물보다 상류 지역에서 유입되는 물의 양이 너무 많아서 다시 한계수위에 임박한 것이었다. 게다가, 수문을 열면서 쏟아진 물 때문에 발전소 건물의 전기가 나가버리는 악재가 겹쳤다.
댐 사무소는 '최후의 수단'으로 수문 5개를 모두 개방하고 최대 수량 방류를 결정했다. 홍수통제소와 몇 시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끝에 드디어 허가가 떨어졌고, 오후 5시, 마침내 소양강댐 수문이 개방되며 초당 5,500톤의 물이 폭포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최대 방류를 시작한 당시의 수위는, 무려 197.79m. 최대수위까지 불과 21cm를 남긴 시점이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소양강댐과 대한민국의 운명까지 달라질 수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문을 모두 개방했는 데도 수위는 여전히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상승하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러다가 댐이 무너지면 직원들 본인의 안위도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책임자인 이순혁 부장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만일 한계수위에 도달할 경우, 본인만 남을테니 직원들은 모두 대피하라"는 지시까지 내리기도 했다. 약 한 시간의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수위 그래프가 딱 '1cm' 떨어진 것을 확인한 직원들은 그제서야 얼싸안고 안도하며 "이제 살았다"고 환호했다.
저녁 8시, 소양강댐에서 방류한 물이 합류하여 한강에 도달했다. 서울의 인도교 수위는 무려 11.02m로 역대 4번째로 높은 수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큰 추가 피해는 없었다. 위험수위를 넘긴 했지만 최대한 시간을 지연했고 미리 예측하여 방류한 덕분에 한강이 범람할 정도의 타이밍은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소양강 댐쪽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발전소 건물까지 들어찬 물로 또다시 침수가 시작된 것. 당황한 직원들은 온갖 도구를 동원하여 쏟아지는 물을 막기 위하여 사투를 벌였다. 직원들이 고립된 상황에서 자칫 전기라도 들어온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인근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사택에 있었던 직원들의 가족도 발을 동동 구르며 발전소가 잠기는 모습을 지켜봐야만했다.
몇 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다행히 들이치던 물이 잠잠해졌다. 직원들은 이틀 내내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며 탈진한 상태였다. 그때 유속을 확인하러 상류에 갔다가 고립된 직원들이 상황이 나아지면서 발전소로 무사히 돌아오는 희소식도 있었다. 직원들은 끓이지도 못한 생라면 한 박스를 부숴서 나눠 먹으며 허기를 달래야해다.
9월 4일 오후 2시가 되어서야, 4일간의 수문 방류를 끝내고 모든 수문이 닫혔다. 끊임없이 내리던 비도 비로소 잠잠해졌다. 사무소 직원들은 모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누구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모두의 노력이 합쳐지며 며칠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양강 댐은 서서히 일상을 회복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사무소에는 다시 100일 만에 모든 시설을 복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만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시설이었기에 직원들이 힘든 와중에도밤낮없이 노력했고, 오히려 목표했던 기간이 되기도 전에 수해 이전으로 발전 시설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도 수해복구 작업이 이어졌다. 주민들은 침수로 떠내려간 생필품들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업은 무료와 기부로 각종 후원행사를 열었고 수재민을 위한 모금도 이어졌다. 어려운 위기의 순간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다들 한마음으로 단합했다.
또한 당시 대홍수 사태는 남북관계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놀랍게도 북한이 우리나라를 돕고 싶다고 먼저 손을 내민 것.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수락했고 북한은 적십자사를 통해 쌀과 옷감 등을 지원했다. 북한이 우리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온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그리고 당시 평화 무드는 다음해,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1984년 서울 대홍수'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 사회 전반에도 자연재해와 그 대비 시스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상황을 겪은 소양강댐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조 여수로를 만들고 위급한 상황에서 더 많은 양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할 수 있게 개편됐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두번째 규모의 다목적댐인 충주댐까지 준공되면서, 홍수 조절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스마트 댐 안전관리' 시스템이 도입되며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로 댐의 안전을 지키고 있으며 수자원공사에선 물 관리 종합 상황실을 24시간 가동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2023년은 소양강댐 준공된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기후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우리 안전을 지키기 위한 많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다. 위기의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재해를 인간의 힘만으로 전부 막기는 어렵지만, 동시에 인간의 힘이 모였을때 상상 이상의 결과를 내기도 한다. 위기의 순간을 대비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지 미리 고민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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