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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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람빅이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가치는 이 맥주가 제조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한다.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생산되는 데다 통상적인 대량생산 공정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방법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알던 그것과 과연 동일한 맥주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빵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발효과정이 필수요소다. 그 과정에 촉매로 쓰이는 효모는 인공배양으로 생산물의 품질을 관리하도록 제어하는 게 상식인데 이 람빅은 자연발효에 의존해버린다. 이 공정 때문에 무려 세 가지의 결정적 차이가 발생한다.
첫째는 어마어마한 숙성 기간이다. 람빅은 선 발효과정만 6개월을 기본 소모한다. (다른 맥주는 1주일 혹은 2주일에 끝나는 작업이다) 그리고 숙성되어 판매되기까지는 3년 이상을 요한다. 와인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지난한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발효과정의 상이함 때문에 같은 원액을 숙성용기에 넣더라도 용기별로 맛이 달라지는 걸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대한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1년쯤 지났을 때 시음해 보고 공들여 관리하지만 100% 기성품 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량생산으로 단가를 맞추기엔 치명적 단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연효모, 즉 공기 중에 떠도는 균을 활용하기 때문에 겉보기엔 기겁할 정도로 어수선한 환경에서 제조된다. 하지만 겉보기엔 균이 넘쳐나는 가운데 유산균도 추가되어 독특한 풍미가 형성된다. 오히려 청소를 깨끗이 하다 균을 다 잡아버리면 양조장 문 닫아야 할 판이 된다. 현대인들의 시각에선 대책 없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정 덕분에 람빅은 완성 후 밀봉만 잘하면 기본 25~30년, 이론적으로는 영구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 격이다. 첨단기술과 대자본이 구현할 수 없는, 오랜 경험과 지혜가 축적된 전통방식의 숨은 강점이 극대화된 셈이다.
대량생산과 간편함에 밀리던 람빅의 부활과정
하지만 이런 람빅 맥주는 벨기에의 특산품이지만 자국 내에서도 20세기 중반 이후 외면당하며 침체 일로를 겪어왔다. 그 절정은 20세기 말이었다. 과거엔 물처럼 마시던 일상 음료였지만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일과시간 중에 맥주를 마시기란 금기시되었다. 맥주 식용문화에 대타격이 온 것이다. 게다가 2차 대전 이후 잿더미가 된 상황에 해방군이 된 미군을 통해 미국문화가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코카콜라가 전통 맥주의 자리를 빼앗기 시작한다. 소규모 양조장 위주 체제로 운영되던 람빅 산업으로선 철퇴를 맞은 격이다.
하지만 최대 위기 시절을 경유하며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대량생산 체제 대신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다양한 수요자의 니즈를 맞추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가 변하면서 람빅에게 기사회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전통의 브랜드들이 주류 대기업에 인수되면서 다양한 컬렉션이 추가되는 것도 소비자에겐 환영할 일이지만 람빅 맥주의 전통적 장인들에게 신세대 청년 지망생들이 배움을 청하고, 기본적으로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되던 양조장들에 IT 와 경영 관련 기법이 전수되어 보다 유연한 운영이 가능해지면서 람빅 맥주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후반이 되면 모두 한마음으로 람빅 예찬을 외칠 것만 같던 개별 양조장 브랜드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과 전망이 이어진다. 신세대 후계자들이라도 람빅의 생맥주화 전망에 대해선 의견이 극명히 갈린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람빅 본연의 개념과 배치된다는 입장 vs 대중화와 시장확대를 위해선 생맥주 공정이 필수라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람빅의 기본 제조과정이 처음 시작부터 판매까지 4년을 소모한다는 건 불변이다.
'브랜드 파워'와 '콘텐츠 형성'의 모범사례로서 교육적 효용
그런 람빅은 벨기에의 다른 문화코드와 결합하며 국가적 브랜드의 반열로 람빅을 승화시킨다. '가스트로노미(미식)' 챕터에선 람빅과 궁합이 맞는 요리, 그리고 전통문화를 소개하며 람빅을 마시는 행위에 문화사회학적 서사를 부여한다(실제로 람빅 양조장이 레스토랑이나 퍼브를 함께 운영하며 브랜드 확장에 도전하고 있다). 이는 이 다큐멘터리의 효용성과도 연결된다. 영화 속에서 전통 양조장 운영자가 자긍심 가득한 표정으로 소개하는 것처럼, 20대 동양 청년이 람빅을 맛보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오게 만드는 마법을 이 오래 묵은 맥주를 통해 창출하고 있었다.
람빅의 이런 성공사례는 검증되지 못한 아이디어를 맹신하며 몇 년마다 유행이 바뀌지만 실질적인 경험치는 남기지 못한 채 허상만 쫓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신 성장 동력을 설파하는 업계 관계자들이 진정 참고해야 할 사례다. 중앙정부 지원으로 연명하기 위해 허무맹랑하거나 환경파괴에 기반 둔 발상을 강변하는 일부에게 람빅 장인과 신세대 기업가들이 선보이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 장기지속을 도모하는 유연성은 결여된 덕목의 핵심이라 하겠다.
전통적인 독립예술영화 관객층에게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는 진부한 홍보영화, 텔레비전에서 종종 양산되는 정보전달성 다큐멘터리와 차이점을 찾기 어려운 영화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역사회 브랜드 화에 혈안이 되어 소리높이 외치면서도 정작 성공적인 참고사례들이 차근차근 감수했던 인내와 독창성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도, 이해할 생각도 빈곤한 상황에 이 영화는 하나의 해법을 정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수한 지자체와 관련 단위들에게 본 작품은 하나의 롤 모델을 제시해주는 숨은 보석처럼 기능할 수 있다. 그런 '극강'의 실용성이 제대로 활용될 기회를 얻기를 기원해본다. 엉뚱하게 전혀 근거도 불확실한 예상수익과 경제성 제시 대신에 이 영화 함께 보고 토론하는 게 백배 천배 더 유효할 것임을 보증할 수 있다.
<작품정보> |
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 LAMBIC: ABOUT TIME & PASSION
2019|스페인|킹 왕 짱 맥덕 다큐 / 맥덕들의 성지 다큐
2023.10.11. 개봉|66분|전체관람가
감독 다니엘 루이즈
출연 더크 린데만스, 아망 드벨더, 프랭크 분, 장 반 로이, 카렐 고두, 피에르 틸퀸 외
수입/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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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