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연인>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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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패했다고 왕권이 반드시 불안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역대급 수모를 두 번이나 당하고도 왕권을 무사히 지킨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외교는 못했지만 자리는 잘 지킨 군주였다.
인조는 중종(1506~1544)과 곧잘 비교된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주도하지 못하고 반정 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한동안 공신들의 눈치를 보며 허수아비 임금으로 지냈다. 반면에,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중종처럼 허수아비 임금으로 출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집권 당시의 인조에게는 정치적 약점이 있었다. 쿠데타에 주동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집권세력 내에서는 지위가 탄탄했지만, 일반 민중이 볼 때는 정통성이 상당히 취약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다. 왕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 게 상식이던 시절에, 그는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의 손자라는 지위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이뿐만 아니라 쿠데타 명분 역시 그에게는 제약이 됐다.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결함이 있어 몰아내야 했다면, 선조의 또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게 마땅했다. 선조의 손자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당시의 논리에 맞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을 몰아낸 자신의 쿠데타를 적자·서자 논리로 합리화했다. 둘째 부인의 아들인 이방석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여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아니므로 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그렇게 적자 우선의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이방원은 자신이 곧바로 왕이 되기 힘들었다. 생존한 적자 중에서 첫째인 이방과(정종)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이방과를 추대했다가 기회를 봐서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는 신중함을 보여줬다.
28세의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킨 1623년 당시, 선조의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 폐위된 광해군을 비롯해 인성군(35세), 의창군(34세), 경창군(27세), 흥안군(25세), 경평군(23세), 인흥군(19세), 영성군(17세)이 있었다.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결함이 있어서 광해군의 즉위를 무효화해야 한다면, 선조의 손자인 인조보다는 선조의 또 다른 아들인 이들에게 우선권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인조 쿠데타 이듬해에 발생한 이괄의 난 때 흥안군이 추대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는 쿠데타 직후 인조의 입지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인조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당했다. 병자호란 때는 지금의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의 모랫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그랬으므로 그의 위상은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조를 보며 통쾌해 하는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음력으로 인조 16년 4월 8일자(양력 1638년 5월 21일자) <인조실록>에서 그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날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직후의 민심이반 현상과 관련해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의 광해군 지지 세력이 소를 잡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인 일이 있다'는 내용이 보고됐다.
인조가 왕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