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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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독립영화를 넘어 영역을 확장해 가며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임선우, 장선, 강길우 배우가 아역배우 원탑을 든든히 전후좌우에서 지켜주고 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 역할은 이 관록의 배우들에게도 비교적 생경한 도전이었을 테다. 워낙 검증된 배우들이지만 자신들에게도 낯선 캐릭터를 소화해야 하는 건 물론, 아역 연기자를 마치 실제 주변 어른들처럼 세심하게 연기 합을 맞춰가는 것까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나름대로 영화가 시대물인 만큼 그 시절 실재했을법한 언행을 몸에 입히는 난이도를 다들 큰 탈 없이 소화해 낸다. 임선우 배우가 맡은 담임선생님은 초반엔 명은에게 오히려 덕을 보고 의지하듯 보이기도 하지만, '어른'의 역할을 본인 스스로도 익혀가면서 명은이 방황할 때 제대로 몫을 톡톡히 해낸다. 그 시절 교사들에 대해 우리 각자의 기억은 각기 다르게 마련이지만 어떤 이는 평생 누려보지 못했을 법한 이상적인 '인생의 교사' 역할을 자신의 성장과 함께 이뤄내는 캐릭터다.
여기에 추가로 인상에 남는 두 명의 교사가 존재한다. 교장선생님으로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약방 감초 캐릭터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각인된 배우 김승우의 캐릭터다. 교장선생님은 사회초년생 담임선생님이 지각할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대리수업을 맡는다. 비현실적 캐릭터라 해도 좋을 만큼 우리가 상상하는 교장과는 거리가 먼, 이상화된 캐릭터일 수도 있을 정도다. 그렇게 조금 드문 캐리커처 수준 조연인 줄 알았는데 영화 후반 명은의 결정적인 결단을 수용해주는 성숙한 어른2로 잔잔한 감동을 조성한다. 우리가 겪었던 현실의 교장선생님들은 대개 그렇게 배려해주지 않았었다는 씁쓸한 회고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정말 카메오 수준 등장이지만 명은이 풍파를 겪고 난 뒤 6학년이 되어 만나게 된 (역시 독립영화계에서 맹활약 중인 배우 이한주가 담당한)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선보이는 퍼포먼스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1년 동안 방황을 겪은 명은에게 선사된다.
여기에 서로 스타일이 확 대비되는 명은의 엄마와 아빠를 빼놓을 수 없다. 배우 장선이 맡은 엄마 경희는 그 시절 생활력 강한 실질 가장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량에 가까운 남편을 대신해 억척같이 가정을 지키면서 살림을 책임지는 존재, 그 때문에 자신의 꿈같은 건 애초 포기한 지 오래고 가족에게도 위악적으로 절약을 강요하는 어머니상을 난생처음 맡았지만 우직하게 풀어낸다. 그런 엄마에게서 문득 발견되는 희로애락을 은은하게 발산하는 관록에 시선이 끌린다.
여기에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 강길우는 근래 활동무대가 비약적으로 넓어진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어디에 갖다 놔도 찰떡 같이 역할을 소화하는 능력자인 만큼 본 작품에서도 건들거리며 아내의 속을 태우지만 정 많고 자식을 위하는 (권위적 가부장제의 폐단을 소거한) 전형적인 아버지상을 선보인다. 여기에 명은의 엄마와 관계가 서먹한 외할아버지 역으로 (치과의사로 퇴직 후 제2의 인생으로 전업배우가 된) 이동찬, 그리고 독립영화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곽진무가 '막내'의 동병상련으로 명은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외삼촌 역할로 호위무사 노릇을 제대로 수행한다.
<비밀의 언덕>은 눈여겨볼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배우들을 보는 매력이 만만찮다. 대개 단편경력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장편데뷔작에 다수의 카메오 우정출연을 등장시키곤 한다. 이 경우 의리출연이 적지 않은 바, 무리하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역할로 화면에 낭비적 요소가 되는 경우가 곧잘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들은 억지로 끼워 넣기 위해 투입했다기보다는 꼭 들어가야 할 안성맞춤 배역에 딱 맞춤형 모양새가 돋보인다. 또래 아역배우들 또한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감독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20-30세대 노스탤지어의 용감한 변주
<비밀의 언덕> 영화 자체는 근래 여기저기서 흔하게 관측 가능한 자기 세대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성장물이다. 본인 혹은 본인을 추상화한 주인공의 유소년, 청소년기를 배경으로 이런 부류의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을 택한다. 첫 번째는 잔인한 껍질 깨기의 서사다. 흔히 청소년기에 겪거나 목격한 한국적 현실의 극대화를 취하는 경로다. 왕따나 일진 같은 학원폭력, 청소년 시절에 더 민감하게 다가오게 마련인 상대적 빈곤과 뿌리 깊은 입시 문제 등이 극단화된 형태로 전시된다. 두 번째는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지만 그런 환경이 양념으로 쓰일 뿐, 과거 노스탤지어의 시간을 세밀하게 소묘하듯 그려내는 일군의 흐름이다. 특히 후자는 정치사회적 주제에 대한 강박에서 이탈한 청년세대가 어느새 자신들의 과거를 공유하는 세대적 흐름에 올라섰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자전적/사적인 경향 반영은 격동의 산업화/민주화시기를 지나면서 일면적으로는 안정되고 이면으로는 정체된 시간대를 공유하는 (독립영화 창작의 주요 세력인) 20-30세대적 특성을 필연적으로 반영하게 된다. 부모세대와 일상적으로 티격태격 갈등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 세대는 특이하게도 상대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자 그늘 겸 울타리가 되어주던 조부모 세대를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남매의 여름밤> 같은 영화가 대표적 예시다. 남들과 비교하며 윽박지르거나, 가정형편을 내세우며 꿈을 추락시키거나, 입시경쟁에 숨 가쁘게 내모는 부모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친근한 대상으로 조부모 세대가 등장하는 건 해당 세대가 아닌 이들에겐 제법 화제성이 큰 이슈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 큰 전제로는 이들 창작자들이 유독 10대 초반에 착목한다는 특징을 들 수 있겠다. 숨이 턱 막히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직전 혹은 초입에서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마련이다. 그 당시에는 의미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던, 하지만 돌아보면 각자의 현재 삶으로 이어지는 통과의례 격의 사건들이 주로 조명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미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린 희미한 옛사랑 같은 기억들, 그리고 지금의 자아에 영향을 준 생채기 같은 사건들에 대한 애잔한 향수는 여기에 필수로 탑재되는 요소다.
여기에서 이런 경향 관련 중요한 관건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는가에서 결착되곤 한다. 자기의 일기장을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할 때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내가 보여주고픈 점만 공개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저 인스타그램 감성에 그칠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자랑을 전시하는 데 굳이 타인이 그걸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대중에게 각인되고 기억될 이야기를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치부까지 아전인수가 아니라 공정한 척도에 기준해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고백을 위한 용기가 없다면 장식효과로 채워진 성공담 혹은 자기 연민으로 가득 포장된 비망록은 절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수많은 젊은 창작자들이 이 고지를 끝내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비밀의 언덕>에는 조금 더 특별한 것이 있다.
주인공을 통한 감독 본인의 반성적 성찰이 보편적 공감을 획득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