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택배기사>의 한 장면.
넷플릭스
<택배기사>는 메시지도 뭉툭하다. <택배기사>의 주제의식은 <설국열차>의 그것과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 삼아 체제 유지에 혈안인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자연 재앙이 닥친 가운데 권력층은 물자 배급을 제한한다. 철저히 칸을 나눈다. 단단한 계급 사회를 조직해 사회를 안정시킨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이용하는 비인도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비기득권층은 폭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시도한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단순히 계급투쟁을 다루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득권층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자고 쉽게 말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 작품은 혁명이 궁극적으로 실패한다는 통찰을 보여줬다. 제 아무리 성공한 혁명이라 해도, 지배계층만 바뀔 뿐 실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혁명을 일으킨 이들도 권력에 취할 테니. 월포드가 커티스에게 자리를 넘겨주듯이. 그러니 이 악순환을 끝낼 방법은 하나다. 남궁민수처럼 아예 기차에서 탈출해야 한다. 따라서 <설국열차>는 불합리한 체제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하자는 외침이었다.
<택배기사>는 <설국열차> 같은 야망도, 통찰도 없다. 비판의 칼날은 충분히 예리하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안일하다. 시리즈 후반부에 천명 그룹은 무너진다. 류석은 모든 권력을 잃는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가 힘을 잡는다. 대통령은 새로운 보금자리인 A구역이 모든 난민에게 열려 있다고 발표한다. 류석은 악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선으로 규정된다. '권력자만 바뀌었을 뿐 체제는 그대로 아닌가' 하는 의심은 이분법적인 구도 사이에 설 수 없다. 산소와 거주 구역이 여전히 권력자의 손아귀에 있는데도. 즉, 5-8의 혁명은 새로운 권력자에게 힘을 몰아줬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풍부한 이야기를 펼칠 만한 설정은 일차원적으로 소비된다. 예를 들어 5-8은 태양을 가린 먼지가 옅어지고 햇빛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기차 밖 얼음이 녹고 추위가 약해지고 있다는 <설국열차>의 설정과 판박이다. 그런데 함의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언젠가 마스크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는 일반론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데서 그친다. 반면에 후자는 혁명이 단순히 지배층 타도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핵심적인 설정이다. 기차 밖에서도 살 수 있으니 기차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야망이 담겼다.
카나리아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택배기사>는 공허하다. 어두운 배경은 다양한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대기업의 음모와 계급 사회에 대한 경고는 다급하지 않다. 공허함은 클리셰가 채워 넣는다. 대기업 회장과 저항군 리더의 멘토가 막역한 친구, 동료 사이였다는 식의 익숙한 반전이 뒤따른다.
막연하고 평면적이며 예측 가능한 대립 구도 속에서는 캐릭터도 살아남기 어렵다. 카리스마 있는 히어로도, 위협적인 빌런도 없다. 그저 나쁘게 보여야 하니 나쁜 짓만 골라하는 악역을 내세운다. 실제로 류석의 행적은 기업의 수장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어리석다. 그는 폭주하다가 알아서 무너지고 혁명은 성공했다고 치켜세운다. 에피소드 6개에 긴장감이 감돌 수도 없고, 결말에 쾌감이 있을 수도 없는 이유다.
더 큰 문제도 보인다. <택배기사>의 실패가 <택배기사>만의 실패가 아닐 수 있다는 우려다. 최근 접한 OTT 작품 중 적지 않은 수가 최소한의 개연성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익숙하지 않은 장르를 활용하지만, 고민의 흔적이 부족하다. 현실 속 사건, 클리셰, 상징적인 장면을 짜깁기하고 이목을 끌 스타를 앞세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려된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성공으로 촉발된 한국 콘텐츠의 성장이 양적 성장에서 멈추는 것은 아닐까 싶다. <택배기사>가 카나리아는 아닐까 싶다. K-콘텐츠 시장이 의외로 빨리 무너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노랑새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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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