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의 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인디스토리
첫 번째 에피소드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선우와 수정 사이에 일어나는 사연이다. 딱 봐도 배낭여행객인 선우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같은 줄 좌석에 탄 수정에게 시선이 가는 중이다. 수정은 진한 눈 화장과 검정색 의상으로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선우는 어렵사리 수정에게 말문을 트고 둘은 함께 호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그 과정에서 선우는 수정의 속사정을 듣게 되고 둘은 함께 자석에 끌린 것처럼 시간을 보내게 된다. 배낭여행물의 아이콘이라 할 <비포 선라이즈>에서 청춘남녀가 그들 각자의 일상에서라면 간보기와 조건 따지기로 절대 이뤄지지 않을 즉흥적 교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게 (관객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급진전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둔 장기연애커플 규형과 지원의 이야기다. 둘은 미국에 거주중인 규현의 부모에게 인사차 향하는 길이다. 결혼절차가 제법 진행된 모양새로 신혼여행 준비 직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처음 에피소드의 청춘남녀들에 비해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둘에게 속속 대두한다. 늦은 시간이지만 기왕 온 김에 호텔 수영장을 가고 싶다고 하며 서슴없이 기내에서부터 맥주를 들이키며 여행 기분을 누리고픈 지원과 달리 규현은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지원에게 공유하지 않았던 규형의 또 다른 여행 목적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한번 믿음과 신뢰가 허물어지면 '관계의 종말'은 순식간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행 길에 오른 은실과 그런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동승한 딸 유진의 사연이다. 은실은 꽤 중한 수술을 받으러 가는 듯하다. 젊은 세대에 비해 비행기 여행이 낯설기도 하다. 몸 불편한 데다 낯선 환경, 예정에 없던 연착이 겹치다 보니 은실은 불시착 상황부터 허둥지둥 불안해하며 유진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몸이 아프기도 하니 매사에 안절부절 법석을 부리던 은실은 조금 안정을 찾자마자 한밤중에 해운대 바닷가 구경을 하자고 유진을 채근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묵혀왔던 가족 내의 갈등은 모녀 사이에서 기어코 폭발하고 만다. 부모는 자식이 원망스럽고 자식은 부모에게 서러운 것 투성이다.
3개의 에피소드는 비행기에 탑승했던 21세기 한국인들의 삶을 압축해서 재조명하듯 펼쳐진다. 아직은 우연한 만남과 즉흥적 결정이 가능한, 그 반대급부로 불투명한 미래와 아직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자녀세대의 피로감이 전달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 속 젊은 남녀의 관계는 신기루처럼 하룻밤으로 끝날 듯하다. 그래서 유독 해당 에피소드는 몽환적인 꿈처럼 다가온다. 뉴욕에서 어쩌면 둘은 다시 만날 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 나이이기에 가능한 여운과 단절의 기운이 넘실대는 에피소드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그렇게 가볍게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없는 관계들을 다룬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불과 몇 년쯤 더 나이든 남녀는 현실의 무게와 남들과의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 서로 감춰두기만 했던 균열이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더욱 상처를 벌리게 된다. 이 둘이 내친김에 터트리는 불만 박람회는 영화 전체에서도 감정적 고양이 극에 달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결혼'에 대해 갖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껏 폭로된다. 그런 폭주는 다음 에피소드에선 모녀간 해묵은 감정의 골로 이어진다. 모녀는 서로 묵혀둔 설움을 이때다 하고 뿜어낸다. 여행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일상에선 쉬쉬하던 문제들이 폭발하는 경우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몰입하게 될 공감능력 극강의 순간들이다.
평범한 듯 보여도 정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