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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화재 사건' 그 후... 모두를 울린 소방관의 메일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2.11.11 15:11최종업데이트22.11.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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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 가장 먼저 위험한 현장으로 뛰어들며, 사선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119대원들의 사명감을 함축한 표현이다. 국민들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궂은일과 위험한 상황을 마다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걸맞은 대우와 보상을 받지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 곁을 지켜주고 있는 '소리없는 영웅'들의 눈물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목숨 걸고 화마와 싸운 소방관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SBS
 
11월 1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2001년 홍제동 화재 사고'편을 통하여, 목숨을 걸고 화마와 싸웠던 소방관들의 안타깝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2001년 3월 3일 토요일, 서부소방서 구조대에서 근무하던 권영철 소방관은 아내와 두 아이를 둔 화목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평소와 다름없이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출근했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2교대 체제로 운영되던 소방관들은 한번 출근하면 24시간동안 근무하면서 하루 평균 7회 이상을 현장에 출동해야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화재 진압, 인명구조, 생활안전 등 다양한 업무를 소화하는 소방관들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사건은 역시 새벽에 걸려오는 화재 신고다. 발견이 늦어져서 자칫 대형화재로 번지기 쉽기 때문이었다.
 
3월 4일 새벽 3시 47분, 홍제동에서 화재신고가 접수된다. 마침 직전에 녹번동에서 화재 오인 신고로 출동했다가 철수하는 중이었던 소방대는, 의도치않게 출동시간을 2분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2분은 짧은 시간이지만, 화재 현장에서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귀중한 골든타임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빠른 출동에도 불구하고 소방차량은 화재 현장을 약 150미터 정도 남기고 갑자기 멈춰서야 했다. 바로 화재 현장으로 가는 길은 막아선 불법 주정차 차량들 때문에 더 이상의 진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대원들은 20kg이 넘는 무거운 각종 소방 장비들을 직접 들고 소방 호스 12개를 연결해가는 수고를 감수해며 현장을 향해 뛰어가야 했다.
 
화재 현장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다가구 주택이었다. 2층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던 세입자는 1층에서 연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소방서에 신고했다. 하지만 소방관들이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창문으로 불길이 솟구치면서 소방 용어로 '최성기'라고 할만큼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대원들이 화재 진압을 시도하는 가운데 주택에 거주하던 다른 사람들은 다행히 모두 빠져나왔지만 집주인 아주머니는 유일하게 아들이 안에서 아직 나오지 못했다며 있다며 대원들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대원들은 요구조자를 구하기 위하여 건물 진입을 결정하고 망설임없이 불길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험한 열기와 유독가스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대원들은 결국 철수했다.
 
그럼에도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들이 분명히 저안에 있다"고 울부짖으며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권 대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소방관도 똑같은 인간이다. 높은 온도속에서 활동하기는 참 힘들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로 요구조자가 있다면, 두 번 세 번이고 찾을 때까지 검색한다. 그래야만 하니까"라고 고백했다. 결국 6명의 소방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지하까지 재차 수색했음에도 여전히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이 한숨을 쉬며 지상으로 올라오던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2층 건물이 붕괴됐다. 수색을 위해 내부에 진입했던 6명과 현관 앞에 있는 대원까지 총 7명이 순식간에 매몰되고 말았다. 현장은 엄청난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새벽 4시 11분의 일이었다.
 
붕괴의 충격에 휩쓸려 잠시 정신을 잃은 권 대원은 얼마 후 의식을 찾았으나 주변에 다른 대원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권 대원은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높았던 건물이 무너져서 허리밖에 오지 않았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뭐라고 표현이 안 되고 말이 안나오더라"고 회상했다.
 
외부에 있던 소방관들은 목이 터져라 무전을 외쳤지만 매몰된 대원들에게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대원들의 생사확인도 되지 않고 매몰된 아래는 유독가스로 가득찬 가운데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전 대원들이 달려들어 건물 잔해를 헤치며 구조작업에 나섰다.
 
당시 비번이었던 이성촌 대원도 비상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이 대원은 "출동을 많이 다녔지만, 내 동료가 매몰되어 구하러 간다고 했을때는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저도 많이 떨림이 오면서 제발 아무일 없기만을 바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과 수도권 각지에서 연락을 받은 250여 명의 소방관이 홍제동으로 집결했다. 대원들은 하나같이 '내 동료의 목숨은 내손으로 구한다'는 일념으로 망설임없이 사선으로 향했다.
 
구조대는 현관쪽에서 방수작업을 하고 있던 김철홍 대원을 매몰 50분만인 오전 5시에 가장 먼저 발견하고 잔해 속에서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시가 급했던 구조대는 김 대원의 상태를 확인할 틈도 없이 구급대원들에게 인계하고, 다시 남은 6명의 대원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사투를 벌여야 했다.
 
문제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모두 치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 대원들은 지하에서 구멍을 뚫어서 직접 밑으로 진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제부터 시간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이성촌 대원은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렸다"고 회상했다. 권영철 대원은 "소리없는 눈물만 떨어질 뿐, 말 한마디 할수 없었다"며 절박했던 그날의 상황을 떠올렸다. 불법주정차 때문에 중장비가 진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원들은 삽과 곡괭이 등 온갖 도구들을 동원하여 수작업으로 동료를 구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했다.
 
건물붕괴 2시간이 훌쩍 흘렀다. 이미 공기통의 사용한계인 25분은 훌쩍 지난지 오래였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위험하고 벗어도 유독가스 때문에 위험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대원들은 영하의 추위에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누구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대원들 모두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같은 동료들이 어떠한 힘든 상황도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붕괴 3시간만인 오전 7시, 드디어 구멍이 뚫리며 지하로 가는 통로가 확보됐다. 구멍의 크기는 장비도 없이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구멍의 크기를 키우려면 더 많은 시간이 지체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수 없던 구조대는 권영철-이성촌 대원을 필두로 안으로 진입했다.
 
유독가스로 가득차고 시야도 확보되지 않은 어두운 공간, 구조대는 전력을 다해 수색에 나선끝에 마침내 매몰된 대원들을 하나둘씩 발견했다. 오전 7시 34분, 매몰 3시간 23분만에 두 번째 동료인 이승기 소방관이 구조됐다. 하지만 구조대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다시 남은 대원들을 찾는 데 집중했다.
 
구조대는 김기석, 박준우, 박동규, 장석찬, 박상옥 소방관들은 3-4분 간격으로 차례로 구조하어 지상으로 올려보냈다. 건물붕괴 이후 3시간 46분, 변변한 중장비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소방대원들의 포기하지 않은 집념과 헌신이 만들어낸 기적으로 매몰된 대원들을 전원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구조된 대원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유일하게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집주인의 아들이었다. 구조대는 숨돌릴 틈도 없이 다시 작업과 수색에 나섰지만 아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런데 구조대에게 연이어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동료들이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연달아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이성촌 대원은 "눈까지 막 오는데 미치겠더라. 동료들한테 가서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소방관이기에 현장을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오전 9시 28분,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하여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난 화재 조사관은 "아들이 정말 집에 있는 게 맞나"고 재차 확인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친척이 "아들이 아침에 외삼촌 댁에 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들은 화재 당시 처음부터 집에 없었고, 대원들은 있지도 않은 요구조자를 구하려고 불길속에 뛰어들었다가 안타까운 변을 당한 것이다. 진실을 알게된 화재조사관은 곧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권 대원은 침통한 표정으로 "정말 어이가 없었다. 거주하던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없었다. 그 말한마디였으면 6명의 대원들이 순직하지 않았다"고 씁쓸해했다. 뒤늦게 현장에서 소식을 들은 모든 구조대원들은 모두 할말을 잃고 침묵에 빠졌다. 동료들을 구조했다고 생각한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뒤였다.
 
가슴 아픈 반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소방관들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의 원인은 놀랍게도 방화였다. 심지어 그 범인은 바로 집주인의 아들이었다.
 
그날 새벽 집주인과 아들 모자는 심하게 다퉜고 아들에게 폭행당한 어머니는 집밖으로 도피했다. 아들은 홧김에 이불에 불을 붙였는데 예상보다 불길이 크게 번지자 놀라서 친척집으로 달아났던 것. 그 사실을 몰랐던 집주인 어머니는 아들이 아직 집에 있는줄 알고 소방관들을 사지에 내몰게 됐다. 경찰에 체포된 범인이 "방인의 이불에 불을 붙인 것이 타다가 꺼질줄 알았는데 활할 타올라서 당황했다"고 변명하는 모습은 전국민들을 공분에 빠뜨렸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진실을 알게된 이성촌 대원은 "그러려고 소방관이 됐나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괴감에 빠졌다. 충격적인 화재 원인에 많은 대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얼마 후 서울시청에서 소방공무원과 유가족들, 시민들이 참석하여 순직소방관들의 합동영결식이 열렸다. 많은 이들이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소방관들의 마지막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 동료 소방관이 "부디 거기서는 소방관하지말고 편안하고 안전한 직업을 하라"며 애통하게 울부짖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순직한 박준우 소방관은 불과 일주일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예비 신랑이었다. 박 대원의 모친인 김원숙 씨는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래도 '내 아들 장하다'는 마음은 늘 갖고 있다.'며 아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김철홍 소방관은 30만원의 현장근무 수당을 아픈 모친의 병원비에 보태기 위하여 내근직에서 현장직으로 자원했다. 김 소방관의 순직 이후 그의 누나 김미순씨는 동생의 몫을 대신하기 위하여 지역 의용소방대에 자원하여 소방업무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동생을 기리고 있었다.
 
장석천 소방관의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여 항상 "먼저 나서가나 앞장서지 좀 말라"고 당부했지만 한번도 대답을 듣지못했다고 한다. 거짓말을 못하는 남편은 지킬수 없는 약속에 그냥 씩 웃는 것으로 항상 대답을 대신했다고.

또한 박동규 소방관의 동생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묵묵히 헌신하던 형을 보면서 "나도 저런 멋진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형의 뒤를 이어 소방관이 됐다. 박상옥 소방관은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그해 봄 넓은 집으로 이사하여 노부모를 모실 생각에 들떠 있었다.
 
김기석 소방관은 순직 한달전에 후배에게 메일을 보내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의사의 역할도 남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지만, 자신을 내던지면서 구하지는 않지 않는가. 나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이 직업에 만족하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내 한 목숨 선선하게 내던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을 하나의 '성직'으로 여긴다네"라는 한편의 수필같은 어록에서는 김기석 소방관의 직업에 대한 깊은 자부심이 드러난다.

이어 김 소방관은 "무너긴 건물의 잔재에 파묻혀보기도 하고 성난 불길의 협박에 올라보기도 했고, 하지만 인간사 모두 하늘의 뜻이라고 주어진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사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다가 간다면 내세에 좋은 인연으로 좋은 몸을 받고 태어나지 않을까?"라는 속마음을 전했다. 소방관이라는 일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은 듣는 이들을 뭉클하게 한다.

살아남은 소방관들의 숙명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SBS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SBS
 
2001년 당시, 소방관 한 명이 책임져야하는 시민의 숫자는 무려 2천명, 같은 시기의 미국(208명)과 비교하면 무려 열배 차이였다. 떠난 동료를 애도할 시간도, 지치고 아픈 몸의 상처를 추스를 틈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어야했던 대한민국 소방관들의 처절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홍제동 사고에 투입되었던 소방관들은 동료들을 잃은 지 하루만에 슬픔을 추스를 틈도 없이 또다시 화재 진압을 위하여 현장으로 출동해야했다. 살아남은 소방관들의 숙명이었다.
 
누구보다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해야하는 소방관들이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경찰이나 군인과는 달리 전문병원도 없었고, 부상을 당해도 제대로 보상과 지원도 받지못하고 자비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소방관들에게 필수적인 방화복은 당시 120만원에 이르는 비싼 비용 때문에, 당시 대원들은 8만 원에 불과한 방수복을 착용하고 위험한 화재현장을 누벼야 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소방관들의 임무라면, 이들의 생명과 재산은 과연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다행히 홍제동 사고 이후 21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나마 소방 환경에 대한 외적 처우는 많이 개선됐다. 소방의 발전이 홍제동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많은 희생이 나온 뒤에야 제도와 환경이 바꿀수 있었던 것인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승기 소방관은 매몰된 대원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지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한 베테랑이 된 이 소방관은 "당시의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이 세상을 떠나고 혹시라도 옛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잘 지냈냐'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매일같이 가장 자주 쓰는 용어가 46과 47이다. 46은 '알았나, 괜찮나?'라는 질문, 47은 '알았다. 괜찮다'라는 대답 신호다. 이성촌 소방관은 순직한 여섯 명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분들중 한번이라도 47이라는 대답을 한번 듣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현재 이 소방관의 등에는 화상 흉터위에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가장 늦게 나와야 한다는 소방관의 소명을 항상 잊지 않고 되새기려는 의미였다.
 
최근 안타까운 이태원 참사 등으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의 역할과 중요성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소방관들은 "현장에 처음으로 도착해 마지막까지 지킨 것이 소방인데 돌아오는 것은 정작…"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소방 책임론에 안타까운 심경을 내비쳤다.

이태원 압사 참사 후 용산소방서 이은주 구급팀장은 "저희들은 단 한 순간도 걷지 않고 계속 뛰었다. 구급대원뿐 아니라 출동한 모든 대원이 똑같이 최선을 다했다. 그런 행적이 묻히게 되는 게 두렵고 무섭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21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은 것은 바로 소방관들을 바라보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방관들에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기대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할 것이 아닌, 공정한 대우와 평가가 우선 필요하다. 한 두 사람이 잘못된 행동과 착각이 훌륭한 6명의 소방관들을 허무하게 잃게 만들었던 것처럼,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을 수도 있다. 흔히 '시민을 살리는 게 소방관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시민도 소방관을 살릴 수 있다'는 격언을 기억해야하는 이유다. 
꼬꼬무 홍제동화재사고 소방관 119구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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