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자신과 자신 실존의 그늘이 함께 추는 발랄하고 유쾌한 춤

[공연 리뷰]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22.08.30 16:40최종업데이트22.08.3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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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실체에 부수하는 가변적 현상이다. 대표적 대중예술인 영화에서는 그림자가 공포를 제시하는 흔한 맥락이다. 부수하는 그리하여 후행하기 마련인 그림자를 선행하게 함으로써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존재를 분명하게 표명하면서도 실체를 감추는 방식이다. 부수하는 것은 더는 부수하지 않고 존재의 일부가 된다. 나아가 연출에 따라 그림자가 아예 존재를 대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컨대 공포 같은 것의 실체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다음엔 그림자에서 더 공포가 산출되지 않는다.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그림자라는 게 실체에 붙어있기에 드물게 대체까지 발생한다고 하여도 결코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런 그림자를 찾는다면 내 그림자가 아니라 남의 그림자이다. 실체에서 그림자를 분리할 수가 없으니 다른 실체의 그림자만이 나에게서 분리된 그림자가 될 수 있다. 다른 실체라는 사실이 우선 파악되어야겠다. 제 그림자의 분리는 빛의 소멸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분리가 아닌 소멸만이 제 그림자의 운명이다.

공포는 대체로 다른 실체가 유발한다. 다른 실체의 그림자 또한 그럴 수 있다.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공포를 산출하는 상황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의 논의에 기대면 그 그림자가 자신과 분리된 것이 아닌 만큼 그림자가 공포의 실체가 될 수 없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공포를 느낀다기보다는 자신의 공포가 그림자에 투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8월 12일 축제극장몸짓에서 공연된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는 그림자를 소재로 한 창작무용이다. 춘천공연예술제에 올려진 이 작품은 주목받는 젊은 무용가 정보경이 안무했고, 정보경과 김주빈이 춤을 췄다. 그르메는 그림자의 옛 말이다.

'나의 그르메'이니까, 이 무용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삐삐 머리를 한 여자 무용수가 곰 얼굴을 뒤집어쓴 그림자 역의 남자 무용수와 다정다감하게 몸의 언어를 주고받는다. 당연히 공포물이 아니다.

나의 그림자는 또 다른 나의 실존이란 관점에서 공연은 전개된다. 1장은 '나는 누구였을까'를 묻는다. 일종의 플래시백이다. 예술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은 흔한 현상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다음의 가사로 동성애라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백했다고 알려져 있다.
 
Mama, just killed a man.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가사가 없는 몸의 언어가 행한 성찰과 고백은 대중가요처럼 뚜렷하진 않아서, 그것이 무엇에 관한 고백과 성찰인지 헷갈릴 수 있다. 무턱대고 공연을 본다면 소녀와 그림자로 보기보다는 2% 혹은 20% 부족한 미녀와 야수로 볼 수도 있다. 이때 제목의 도움을 받는다. 관객은 여자 무용수와 곰 얼굴을 한 남자 무용수가 펼치는 동작과 몸짓을 통해 소녀의 자기 탐색과 성장을 유추한다.

여기서 그림자는, 공포의 매개체가 아니라는 게 확실할뿐더러 구성상 실체로부터 분리된 그림자라는 것 또한 확실하다. 소멸하지 않은, 분리된 자신의 그림자이다. 극의 전개를 위해 그림자는 명확한 실체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정확하게는 분신 비슷한 의미 부여이다. 그러한 분리에도 둘은 대립하거나 분열하지 않는다. 대립하거나 분열하지 않도록 연출됐다. 대화하며 고양된 종합을 향해 가기에 그르메는 친구와 다를 것이 없다.

그림자를 독자적인 무용수로 등장시켰기에 춤이 조금 더 극의 성격을 띠는 것은 불가피하다. 서사가 존재하는 무용이 된 만큼 서사의 느낌이 결정되어야 한다. 정보경은 공연에 전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부여하면서 유머를 묻혔다. 약간의 쓸쓸함이 무대 전반에 깔리지만 넘치는 에너지를 품어내며 위트가 풍기는 발랄한 기운을 발산하기에 관객은 쓸쓸함이 주는 의미와 활기참이 주는 즐거움을 같이 향유한다.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이 춤에선 "Mama, just killed a man"과 같은 심각한 진술은 없다. 대비하면, 안무가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를 구상할 때 아버지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성장에 관한 이야기지만, "just killed a man"과 같은 존재의 전면적 위기가 없다. 동행하고 후견하며 묵묵히 뒤를 지켜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그르메에 투영되었다.

여기서 그르메에 실존의 그늘과 아버지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분리되어 개별적 실체처럼 보이는 공연은, 구성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것은 나의 그림자이자, 그림자처럼 나를 돌보는 아버지의 이미지이다.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나래이션에서 "해가 밝아오면 그르메는 바닥으로 녹아든다"는 말은, 그르메의 물리적 특성과 성장담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중의한다. 1장이 자신을 탐색한다면 2장은 성장과 관련한 시간을 다룬다. 그르메는 바닥으로, 혹은 실체에 녹아들면서 소녀에게 세상이 되어준다. 그제야 딸은 아버지의 실체를 이해한다. 제대로 된 분리 후에 자신에게 녹아든 아버지의 몸을 감각하고 그것은 두 사람이 추는, 자신과 자신 실존의 그늘이 함께 추는 춤이 된다.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정보경
 
만약 일인무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 조명과 자신의 몸만으로 제 그림자를 무대 뒤편 스크린에 떨구는, 무대와 벽면의 흑백 공연은 자못 진지한 양상이 되었지 싶다. 이인무로 된 현실의 공연은 무대장악력이 뛰어난 안무와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사위에 빨려 들어갈 수 있어 그것대로 충분히 훌륭했다. 

글 안치용 춤평론가, 사진 정보경 안무가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정보경 춘천공연예술제 김주빈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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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미술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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