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자, 세계 해전사에 손꼽히는 명장으로 이순신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성인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고 초월적이기만 한 인물은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당대에는 이순신 역시 우리가 다를 것 없이 고통에 아파하고 선택에 고뇌할줄 아는 똑같은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진정한 위대함이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한의 인내와 노력을 바탕으로 나약한 인간의 한계마저 극복하려고 했던 숭고한 의지에 있을 것이다.
7월 10일 방송된 KBS <역사저널 그날> 368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특집' 첫 번째 이야기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의 가치를 조명했다.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의 전사를 이순신의 시각에서 자세하게 조명한 난중일기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으로 불렸던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꼽히며 이순신이 남긴 또다른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중, 훼손되거나 소멸될 위기에 놓인 기록물들을 보존, 이용하기 위하여 선정된다. 세계기록유산을 영어로 번역하면 '메모리 오브 더 월드(Memory of the world)'가 된다. 특히 기록을 의미하는 단어로 단순한 사실에 가까운 레코드(Record) 대신, 감정과 생각이 담겨있는 메모리라는 단어를 쓴 것이 두드러진다. 전세계가 함께 기억하고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기록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무려 16개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지난 2013년에 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많이 알려진 난중일기 외에도 국보로 지적된 임진장초라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가 주로 하루 일정과 사적-공적인 만남, 개인적 일과 감정을 빠르게 흘려쓴 초서체에 담았다면, 임진장초는 국왕에게 보고하는 공식문서로 한 글자마다 꼼꼼하고 선명하게 적어낸 필체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난중일기는 당시 이순신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원균에 대한 언급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원균을 30차례 이상 언급하면서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균의 말은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어 무어라 형언할수 없다'라고 폭로한 내용이나 원균의 술주정에 불쾌감을 느낀 일화, 원균을 '원흉'이라는 멸칭으로 부른 대목 등을 통하여 이순신이 원균을 정말로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짐작게케 한다.
다만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겸 이순신학과장은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쓴 목적이 후세의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의미부여도 지양해야할 것"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높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선조 정권의 견제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평가가 점점 높아졌다. 정조 19년에 이르면 이순신의 인품, 행적, 전언 등을 망라한 전집인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었고, 편찬자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이하여 이순신의 친필 초고에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꾸준히 이어지던 이순신의 일기에 꽤 긴 공백기간(6.11-8.23)이 발생한 것이 보인다. 바로 이 기간이 이순신의 빛나는 전공인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이 벌어졌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1594년부터 1596년까지는 다시 기록이 빽빽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기록이 많았던 1595년에는 365일중 단 20일을 뺀 345일을 모두 채웠다.
난중일기 기록은 정유년인 1597년 1-3월 들어 한동안 중단된다. 바로 이순신이 명령불복종 혐의로 파직되어 투옥당하며 고난을 겪고있던 시기였다.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큰 타격을 입고 이순신이 4월에 백의종군하며 일기도 재개된다.
감옥에서 풀려난 4월 1일부터 다시 시작된 일기에는 "맑음, 옥문을 나왔다. 조카와 아들과 함께 오랫동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라면서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난중일기에는 어디에도 이순신이 자신을 투옥한 군왕 선조에 대한 원망을 담은 기록이 없다. 이민웅 교수는 "이순신은 충과 효를 강조한 조선 성리학이 낳은 참인재"라고 극찬했다.
그해 8월과 10월에, 이순신은 일기를 무려 두 번씩 작성한다. 바로 한국사의 가장스러운 승전중 하나인 명량대첩이 있었던 기간이다. 이순신이 난중일기 외에도 정유일기를 통하여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명량대첩 당일의 내용을 유독 자세하게 서술해놨다.
이순신은 명랑대첩을 앞둔 9월 15일, 전투에 나서는 장병들에게 '반드시 죽으려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당시 조 선수군의 함대는 단 13척, 일본군의 함대는 약 330여척에 이르렀다.
9월 16일 전투에 나선 이순신은 중과부적이라고 여겨 도망갈 궁리만 하던 부하 안위에게 군법으로 질타하며 전투를 독려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시에 돌격하여 현자총통과 화살을 쏟아내며 처절한 전투를 펼쳤다. 적선 30여척을 쳐부수자 일본군은 그대로 달아났고 다시 나서지 못했다. 극적인 승리 이후 이순신은 "이번일은 실로 천행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명랑대첩의 위대한 승리는 이순신의 꼼꼼한 기록 덕분에 역사에 더 정확하게 남을수 있었다. 이순신은 정유일기에서 정찰부대의 보고부터 전쟁의 승리까지 명량대첩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기록했다. 이후 다시 기록한 두 번째 정유일기에는 전황의 변화와 조선군이 거둔 전공, 상대의 반응 등까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했다.
허준은 영광스러운 승리의 순간을 기록했음에도 이순신의 글에서 웬지 슬픔이 느껴진다는 소감을 밝혔다. 휘하 장수가 항명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초반 전황이 절망적이었다. 허준은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전사하더라도 후대 장군들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욱 상세히 기록한 것이 아니었을까"라며 이순신의 당시 심경에 이입했다.
이시원은 난중일기를 통하여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분석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직무에 태만하다거나 군영을 이탈한 부하들을 엄벌했다는 내용이 상당수 담겨있다. 혹독하지만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더욱 철저한 '원칙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의 고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규칙을 잘 지키는자 에겐 최대한 보상을 해줬다. 최태성은 이순신을 여러 리더의 유형중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로 분류했다. 이순신의 기적같은 승리들도 내용을 알고 보면 모두 기획단계에서부터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난중일기의 또 다른 가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 자료'라는 것이다. 실제로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16세기 당시의 날씨는 현재의 장마철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실록에도 기상 이변과 재해기록은 있지만, 해안지역의 날씨 변화를 기록한 것은 난중일기가 유일하다. 이순신은 '더위가 쇠도 녹일듯 하다.' '큰 섬이 찌는 듯하다.' '추위가 살을 도리는 것 같았다'라는 생생한 표현들로 당시의 날씨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원활한 전쟁과 함대 운용을 위하여 기후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않았다. 멤버들은 '500년전에 이미 빅데이터를 수집했다.' '살아있는 기상청'이라며 이순신의 혜안과 치밀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다.
이순신의 기록에서 가장 고통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은 가족을 잃은 순간이었다.1597년 4월 옥살이를 마치고 백의종군 길에 오르던 이순신은 아들의 투옥 소식에 급하게 올라오던 어머니의 부고를 듣게 된다.
이순신은 소식을 듣고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보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1597, 4.13)"이라며 처절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순신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해 10월에는 아들 이면을 잃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1597.10.14.)"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1년 같구나(도야여년)라는 표현에서 이순신의 처절한 절망감이 드러난다. 어머니와 아들을 잃고도 슬픔에 잠길 틈도 없고 이순신은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전투에 나서야 했다.
이순신 본인의 건강도 편치 않았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몸이 불편하다고 남긴 기록이 무려 90회 이상에 이른다. 김남일 경희대 한의과 교수는 난중일기에서 자주 식은땀을 흘리고 토사곽란을 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순신의 체질이 한방의학상 '소음인'에 가깝고 당시 건강상태가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해야할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부하들의 사기 저하를 의식하여 이순신은 차마 마음껏 아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이순신은 전쟁과 리더로서의 스트레스를 주로 술로 달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에는 술과 관련된 기록도 90회 이상 등장한다. 전시에 불규칙한 생활패턴과 음주는 이순신의 건강을 악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술을 마시고 만취하여 토했다거나 대청에서 엎어져서 잤다는 고백은 항상 냉철해보이기만 하던 이순신에게도 허술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전쟁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1598년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량해전이 벌어진 11월 19일 전투도중 전사한다. 난중일기의 마지막 기록은 노량해전을 불과 이틀 앞두고 포획한 일본군의 어선과 군량을 명나라군에게 빼앗겼다는 내용에서 끝난다.
이순신의 안타까운 최후와 맞물려 굳이 마지막 전투까지 무리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접어들며 조선 땅 침탈 그 자체가 목표가 되면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피해가 속출했다. 침략이 피해자와 이순신과 조선 백성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물러난다고 해도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지 않고 절대 호락호락 용서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최후의 순간마저도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자신보다 아군의 승리와 조국을 먼저 생각했다. 일본군은 노량해전에서 500여척중 200여척을 잃었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약 50여척에 불과했다. 영국인 피터 빈트는 프랑스와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조국의 승리를 이끌고 전사한 넬슨 제독과 비교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기에 전설이 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난중일기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담은 기록이지만, 성웅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볼수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유산이다. 이순신이 처음부터 완벽한 인물이나 성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기라는 기록을 통하여 하루하루 스스로를 성찰하고 성장하며 위대한 인물로까지 거듭났다.
기록은 기억할수 있게 만들고, 기억은 곧 역사가 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영웅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통하여 오늘날의 후세에 전하는 또다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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