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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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의 '부정'
이를 위해 영화는 삼중의 '부정'을 끌고 온다. 우선 첫 번째는 아들이, 손자가 학교 폭력을 자행했을 리 없다는 부정(否定)이다. 의식불명 상태인 건우가 발견되고, 담임교사인 정욱이 건우의 편지를 읽어주며 학교 폭력이 그 원인이라 밝히자 학교에 모인 아버지들은 격렬하게 반발한다. 조금씩 드러나는 진상이 아이들 미래에 그늘을 드리울 것이 확실해질수록, 그들이 부정하는 대상은 더 많아진다. 정욱의 증언과 편지 내용을 부정한 그들은 건우의 핸드폰에 존재하는 증거도 부정한다. 괴롭힘당하는 건우를 목격한 '남지호(노정의)'의 기억도 부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부정의 욕구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분출되기에, 잘못된 선택임이 분명할지언정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아버지들의 태도는 결과 지상주의가 낳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아들들이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뿐, 종국에는 착하고 좋은 학생이 될 것이라고 우긴다. 이는 이로운 결과를 낼 수 있다면 그 과정과 방식에 있어서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문제 삼지 않으면 된다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산업화와 개발 성장 시대의 분위기와 진리가 낳은 악행이나 다름없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음 국제중학교가 결과 지상주의의 또 다른 양상인 성적 지상주의로 팽배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작중 학교의 모습은 상당히 작위적이고 또 이질적이다. 거대한 소용돌이 모습을 한 나선형 계단과 초호화 인테리어로 장식된 교내와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대형 아치 기둥의 외형, 그리고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은 부자연스럽다. 이는 대한민국의 뜨거운 교육열이 부정부패와 비리로 엮인 교장과 부모, 정교사 채용을 사이에 둔 학교장과 교사의 권력과 상생 구조를 낳고, 결과적으로 참된 의미의 교육이 아닌, 성적 지상주의로 향하고 있음을 내보인다. 곧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회적 현실의 단면, 그로 인한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두려움이 현실을 부정하려는 사회적 특권 의식들의 욕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정(否定)으로 가득한 초반부는 이제 국면이 전환되면서 부정(不正)한 이들을 찾아내기 위한 사투에 돌입한다. 사건의 진상을 수면 아래로 내리려는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우의 죽음과 담임교사의 폭로로 인해 이제 경찰이 학교 폭력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 편인 줄 알았던 네 명의 가해자와 그들의 아버지들은 제각기 생존을 위한 사투를 펼친다. 함께 입을 맞추었던 계획은 무산되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다고 비난하면서 가해자의 자리를 서로에게 떠넘긴다.
이는 가해자의 시점에서 범죄를 다룰 때 가능한 피카레스크(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인물이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들로 등장, 해당 이야기를 이끄는 소설 장르)의 묘미를 한껏 이끌어낸다. 사실 학교 폭력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진상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대목이 존재한다. 네 명의 가해자 중 진짜 주동자가 누구이며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누구인지, 가해자 편에 있는 한결과 피해자인 건우의 관계 등은 익숙한 클리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사건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듯 보이는 한결과 아빠 호창이 가해자 그룹 안에서의 희생자로 낙점받으면서 가해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수싸움은 예측 가능한 전개에 서스펜스를 더해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진흙탕 싸움은 모든 진상이 드러나는 순간 반전의 충격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평범한 신파극의 여지도 없애버린다. 한결과 호창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었다가 유대관계를 단숨에 끊어버리면서 그 어떤 선인도 없이 악인들로 가득한 피카레스크 장르의 쾌감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영화는 단순히 네 명의 가해자들이 서로 누가 더 부정한 짓을 저질렀는지 따지는 것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큰 분량을 주지는 않지만 언론이 건우의 죽음을 다루는 양태를 분명히 포착하고 있다. 재판이 끝나고 법원 입구에서 호창이 건우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제 언론의 관심은 비통하게 아들의 영정을 들고 선 건우 엄마도, 약속받은 정교사직을 내던지고 양심 고백한 교사도 아니다.
아들을 희생양 삼으려는 부정한 악인들을 직접 응징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직접 변호를 맡은 변호사 아빠가 최고의 관심거리다. 무죄를 얻어낸 호창이 건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넬 때, 진짜 가해자를 찾지 못한 피해자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이렇게 영화는 언론이 피해자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고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작게는 영화 속 언론, 크게는 언론이 만든 이슈에만 반응하며 사건의 본질에 관심 갖지 않는 대중들, 더 나아가서는 관객까지도 현실에서 그러한 악인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