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1TV <태종 이방원>
KBS1
조선왕조가 이방원에 의해 새 출발을 했다는 인식은 이방원 본인과 그 자손들에게서도 표출됐다. 이방원과 세종대왕 부자가 훗날 정종으로 불리게 될 제2대 주상인 이방과에게 묘호(사당 명칭)를 부여되지 않은 사실이 그 점을 드러낸다.
클 태(太)가 들어간 태종이란 묘호는 건국시조인 태조에 버금가는 칭호였다. 그래서 태종 묘호를 받은 군주는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한국·중국·베트남 등에서 형성된 관행에 따르면, 이 묘호는 두 번째 임금에게 부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두 번째 군주에게 무조건 태종 묘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 묘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이 두 번째 군주에 국한됐다는 의미다.
제29대 임금인 신라 김춘추가 태종 묘호를 받을 때도 당나라와의 마찰이 있었다. 조선은 신라보다 훨씬 더 중국에 사대를 했기 때문에, 이 묘호를 쓰면 중국과의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3대 임금인 이방원이 이 묘호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태종 묘호를 받았다. 명나라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교묘한' 혹은 '절묘한' 방식을 구사한 결과였다.
1398년에 즉위한 제2대 주상 이방과가 사망한 해는 이방원이 상왕일 때인 1419년이다. 이때의 형식상 임금은 세종이지만 실질적 임금은 상왕인 이방원이었다. 군사권 같은 핵심 권한은 여전히 상왕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과에게 어떤 묘호를 부여할 것인가는 세종이 아닌 이방원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형인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방과가 묘호를 받게 되면, 이방과가 공식적인 제2대 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방과가 태종 묘호를 받든 다른 묘호를 받든, 이방과 이후의 왕들은 태종 묘호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방과 이후의 군주가 제2대 태종이 될 가능성을 남겨놓게 됐다.
태종 묘호는 그로부터 3년 뒤에 사망한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 됐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가 건국시조 이성계를 몰아내고 실질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 사실이 '제2대 태종'이란 위상에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방원이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사실과 세종이 이방원에게 태종 묘호를 준 사실은 이방원이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군주라는 인식이 이방원 가족들 사이에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1398년 쿠데타로 이성계의 나라가 실질적으로 단절됐음을 이들도 인식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과가 정종 묘호를 받은 것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인 1681년이다. 이로 인해 이방과는 공식적으로 제2대 군주의 지위를 갖게 됐다. 엄연한 군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잘못된 일이라는 판단 하에 묘호를 부여하게 됐다.
이는 이방원을 '제2대 태종'이 아니라 '제3대 태종'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대로 밀려남에 따라 이방원이 태종 묘호를 유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색해지고 말았다. '제2대 태종' 위상을 통해 이방원에게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던 사람들의 의도가 훗날 뒤틀리게 됐던 것이다.
1681년 조치가 있기 전까지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었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렸던 것이다. 건국시조를 몰아냈지만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던 이방원이 제2대 태종으로서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상황이 1681년까지 유지됐던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