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호 폭발 장면당시 기록필름 중에서 영화에 인용되었음
넷플릭스
과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실험
이 끔찍한 참사 직후 곧바로 대통령직속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당시의 대통령 레이건은 이 참사로 인해 나사의 위상이 실추되거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 자체가 좌초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사의 입장을 옹호할 법한 인물을 의도적으로 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의 기가막힌 속성 때문이었을까, 조사위원회에는 대통령과 위원장의 의중과 반대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도 다수 위촉되었다.
그런 데다 때마침 나사 직원 중 내부고발자도 나타났다. 급기야 조사위원 중 몇몇 이들이 O링의 문제를 인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위원장 모르게)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조사위원회 청문회의 어느 날, 리처드 파인먼이 마이크를 잡았다. 파인먼은 한 과학실험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청문회장에 출석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얼음물에 고무 재질의 O링을 넣어두었다가 꺼내서 O링의 기능이 얼음물에 들어가기 전처럼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그 전날 밤 집에서 이미 동일한 실험을 한 차례 해보았기에 그 실험결과를 알고 있었다.
파인먼의 실험은 고무 재질 O링의 탄성은 저온에서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런 상태에 열을 가하면 회복력을 상실한 O링이 훼손되어 치명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실험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간단한 실험이었다. 이때 청문회에 불려나온 나사 관계자들은 "당신은 진짜 과학을 모른다"라고 반박할 수 없었고, 실험이 허술했다고 지적할 수 없었으며, "챌린저호에 일어난 문제는 당신의 실험과 무관하다"는 반론을 펼 수도 없었다. 상대가 노벨 물리학상에 빛나는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벨 물리학상에 빛나는 지식인 파인먼이 조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때 그저 명예직으로 간주해 대충 시간만 때우려 했다면? 동료 조사위원 쿠티나 장군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면? 늦은 밤 자신의 집에서 O링 냉각 실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 실험결과를 쿠티나 장군과 의논해 청문회의 적절한 타이밍에 공표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조사위원회 청문회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때 당시 파인먼의 시의적절한 문제제기는 지식인의 권위를 재기발랄하고 올바르게, 무엇보다도 윤리적으로 사용한 좋은 예일 것이다. 그의 발언은 진실된 힘이 있었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합리적 의심을 시민들에게 불러일으켰고, 진실탐구의욕을 언론인들에게 불어넣었으며, 마침내 진상조사활동 전체가 거짓 없이 투명하게 진전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챌린저사고 대통령직속조사위원회가 그때 작성한 보고서는 '조사위원회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매우 모범적인 보고서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파인먼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부해서 남 주냐?"는 격언(?)도 물론 있긴 하지만, '공부해서 남 줄 수 있는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챌린저: 마지막 비행> 4편 엔딩 크레딧을 응시하며, 나는 우리나라에도 파인먼 같은 지식인들이 많기를, 더 많아지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물론 파인먼을 완벽한 인간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는 대부분의 천재과학자들이 듣는 괴짜라는 소리도 들었고, 나서기 좋아하고 쇼맨십에 능한 인물이라거나 반골 기질의 과학자라는 평가들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파인먼의 당시 실험보고와 문제제기를 다룬 동영상 링크를 걸어둔다. 궁금한 분들은 시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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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위즈덤하우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지식공작소), 환경살림 80가지(2022세종도서, 신앙과지성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