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일이>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영화 <태일이>는 가장 부담 없이 전태일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따스한 그림체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1970년대 당시 평화시장, 서울의 실제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한 그림체에 눈이 즐거웠다. 사진 위에 그림이 움직이는 듯, 그림이 사진이 되는 듯 오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따뜻한 그림과 인물들 사이에서 연대의 의미는 더욱 크게 전달됐다.
영화는 태일이와 주변 관계를 보여주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태일이가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도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도우며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말이다. 주변인을 아끼는 태일에게 여공들의 열악한 환경은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돕는다. 때때로 버스값을 털어 어린 '시다'(미싱사 보조)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며 말이다.
태일이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열악한 삶을 경험했고, 하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능력이 좋았다. 그가 주변의 아픔에 마음으로만 공감했다면, 자본가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평온한 미래가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유하진 않아도 가난을 벗어나 배고프지 않은 삶은 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태일이는 그러한 것들보다 사람들 사이의 행복과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 혼자 잘나서는, 잘 돼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태일이를 통해 당장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꿔놓지 않는다면, 나도 언제든 억압의 굴레 속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단사 '신씨'나 폐렴에 걸린 '영미'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들이 태일에게 너의 안전과 나의 안전, 너의 권리와 나의 권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게 했을 거다. 전태일의 그런 감각이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연대로 이어지게 한 게 아닐까. 이외에도 전태일 개인의 숭고한 도덕심을 구조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시켜주는 인물이 있다.
재단사면 재단사가 할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시다들 풀빵이나 사주고 청소나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보조 재단사는 전태일에게 여공들의 처우를 해결하기 위해선 열악한 노동문제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태일은 자신의 개인적 노력에서 나아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제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불러다 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전태일은 처음부터 열사로 태어난 게 아니란 의미가 아니었을까. 시작은 이타적인 마음,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마음을 세상을 바꾸는 불씨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고 그 관계 속에서 전태일의 싸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품고 사는 암울한 시대를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