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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모든 게 꿈일 뿐이야!’ ... 홍상수의 변화가 시작되다

[리뷰]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21.10.24 11:22최종업데이트21.10.2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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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주) 영화제작전원사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가 상영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은 많지 않다. 홍상수 영화를 볼라치면 뜬금없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떠오른다. 1997년 <초록 물고기>에서 시작하여 2018년 <버닝>에 이르기까지 20년 넘도록 고작 6편의 영화를 연출한 과작(寡作)의 이창동.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2021년 <당신 얼굴 앞에서>까지 26편의 영화를 연출한 다작(多作)의 홍상수.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객석의 반응이 쓸쓸하다는 점이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이창동의 <밀양>(2007)이 160만 관객을 모은 일이다. 그것은 2007년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가능했다.
 
인간 세상의 깊고도 너른 실존과 인생길을 묻는 이창동과 일상의 콜콜한 얘기를 요모조모 들여다보는 홍상수를 동렬에 놓고 비교함은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두 감독이 바라보고 투영하는 세계인식과 실천의 거리가 극명하게 어긋나되, 동시에 객석에 던지는 다채로운 문제의식은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공간과 시간

고전 그리스 비극은 하나의 공간에서 8시간 안에 시작하여 끝나되,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기본 틀이었다. 이런 구조는 '삼일치 법칙'으로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기에 널리 알려진다. 관객은 제한된 시공간과 사건 전개에서 교훈과 카타르시스를 얻으면서 아티카의 시민 의식을 고양하는 계기를 비극에서 확인하곤 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자잘한 공간 이동과 24시간 그리고 사건의 부재를 보여준다. 홍상수 영화에서 사건이 실종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사건으로 현대인의 삶이 급변이나 전환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풍이나 지진 혹은 지진해일이 닥친다 해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은 굳건하게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 카페로, 이태원과 인사동으로 옮아가는 공간 이동은 우리에게 새로움이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게다가 놀랄만한 사건이나 충격적인 관계 설정 혹은 파열이 있다면 또 모를까?! 홍상수는 언제나 객석의 작은 바람마저 외면하고 모른 체하는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그렇고 그런 시공간에 못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공간 이태원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관련 이미지.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관련 이미지.영화제작전원사

한물간 여배우 상옥이 도심의 작은 공간에 들어선다. 주저하며 머뭇거리다 올라선 마당에 녹음이 한창이다. 세상은 지금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의 절정과 만나고 있다. 마당에 들어온 그녀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꽃 진 라일락 뒤편으로 들어간다. 누군가 그녀를 부른다. 젊은 집주인 여자다.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담배.
 
재스민과 옥토 세이지가 한창인 마당의 벤치에서 그들은 맛나게 담배를 피운다. 그러고 보면 요즘 홍상수 영화에서 담배와 술이 부쩍 줄었다.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데 술과 담배를 끔찍하게 선호하는 이가 홍상수다. 한 잔의 술과 한 개비의 담배로 인간적인 정리를 나누는 사람들의 현존을 강조하는 홍상수.
 
"너 이름이 뭐야? 서지원이오. 몇 살이야? 여섯 살요.
인천 살아? 네. 인천에 집이 있어? 아니요,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지원이 또래였을 때 이태원 그 집에서 살았다는 상옥. 그녀가 지원이를 꼭 안아준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을 법한 옛일을 기억하고 용케 그곳을 찾아든 상옥. 그녀가 하이힐을 또각또각 소리 나게 하면서 이태원 옛집을 허위허위 빠져나온다. 꿈속을 걷듯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아스팔트 포도(鋪道)에 고정된 시선과 흔들리는 발길.
 
정옥의 꿈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주) 영화제작전원사
 
정옥은 언니가 시애틀에서 서울로 왜 느닷없이 날아왔는지 모른다.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그들은 정겨운 자매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깨어난 상옥은 커피잔을 홀짝거리다 무료한 듯 정옥의 손을 향해 손을 뻗는다. 깊이 잠든 정옥을 상옥은 차마 깨우지 못한다. 정옥과 상옥은 그런 정도의 거리를 안고 살아간다.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 좋은 꿈이야?! 그런 것 같아. 꿈 얘기 좀 해봐.
아니, 최소한 12시간은 지나서 얘기할 거야. 왜?! 복권이라도 한 장 살까 봐!"

 
잠에서 깨어난 정옥이 말하는 꿈은 상옥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정옥은 순순히 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김유신의 누이인 보희와 문희의 꿈 이야기가 재현되는 21세기 서울의 아파트. 보희 자매는 꿈을 팔고 사면서 인생의 급전을 마주하지만, 상옥과 정옥은 우리에게 꿈의 실체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잊힌 꿈이다.
 
소파에 잔뜩 웅크린 채 상옥이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한다. 맞은편 침대에는 정옥이 잠들어 있다. 진작 일어난 언니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셔가지만, 정옥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상옥이 정옥에게 손을 뻗친다. 끙, 소리 내며 돌아눕는 정옥. 상옥이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향해 자리를 옮긴다. 낮은 소리로 그녀가 묻는다.
 
"얘, 정옥아! 꿈을 꾸는 거니?!"
 
꿈은 무엇인가?!
 
인생을 꿈에 빗댄 작품 가운데 <햄릿>은 압권이다. 3막 1장에서 햄릿이 혼잣말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것이다.
잠자는 것은 필경 꿈을 꾸는 것이리라."

 
죽음과 잠과 꿈을 동렬에 놓고 사유하는 셰익스피어의 인식은 가히 놀랄만하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자면서 우리는 날마다 죽음과 얼굴을 마주한다. 잠에서 만나는 꿈은 우리를 망상의 허방다리로 인도하지만, 그 또한 무상을 강조할 따름이다. 꿈에서 인간의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을 도출해낸 자들의 탁견은 그래서 경이롭다.
 
'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장주(莊周)는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훌훌 뛰어넘는다. 꿈속의 나비가 자신인지, 꿈에서 깨어난 자신이 장주인지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장자. 장자의 이야기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색과 공의 무분별,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만난다. 분별과 무분별의 아득한 경계마저 사유하고 수용하는 관자재보살.
 
상옥이 영화감독 재원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를 크게 웃어버림은 무분별에서 분별로 이동하는 절정이며, 그녀에게 할애된 시공간과 운명의 명징한 확인이다. 그녀가 인사동에서 꾸었던 몽롱한 꿈과 기획의 파탄은 문득 그녀에게 깨우침을 던진다. '그래, 모든 게 꿈일 뿐이야!' 하지만 동생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는 모양이다.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포스터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포스터(주) 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당신 얼굴 앞에서 햄릿 호접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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