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기술자를 찾아 북만주로 떠나는 김원봉(유지태 분, 오른쪽).
MBC
이태준이 의열단에 헝가리인 기술자 마쟈르를 소개한 것은 사실이다. 마쟈르가 의열단의 폭탄 활동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의 김원봉은 폭탄 기술자를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폭탄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의열단 운동을 기획하고 지휘했을 뿐 아니라 직접 폭탄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독립운동에서 자주성을 특히 중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종전 직후에 신한청년당 여운형이 독립을 호소할 목적으로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을 때, 김원봉은 '일본 역시 승전국인데, 일본과 한편인 승전국들이 한국 독립을 도와줄 리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파리에 김철성을 자객으로 파견했다. 강화회의에 참석한 일본 대표를 죽이고 독립혁명 정신을 앙양시키겠다는 생각에서였다(관련기사 :
프랑스로 자객 보낸 김원봉... 거사 당일 벌어진 황당한 일 http://omn.kr/1j8z8).
물론 김원봉도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현지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불가피한 지원을 받을 때 받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게 김원봉의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은 무기 확보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가능하다면 무기 역시 직접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인력과 금전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하는 '시장경제원리'만으로 소요 물자를 확보할 수는 없었다. 상당정도의 '자력갱생'을 달성하지 않고는 일본과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연마한 게 폭탄 제조법이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한한, 스물한 살 김원봉
3·1운동이 벌어진 지 3개월 뒤인 1919년 6월, 스물한 살의 김원봉은 서간도(서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상황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끊임없는 폭력만이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마침내는 조국 광복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다. 김원봉의 신념은 확고하게 굳어졌다. 오랜 방황과 번민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김원봉은 여러 달이 지난 뒤 몇몇 동지들과 함께 서간도로 떠났다. 그 사이에 뜻이 맞는 동지들을 새로 얻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새 동지는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김옥·한봉인·한봉근·신철휴 등 8명이었다."
이때 김원봉과 함께했던 일행 중의 한 사람에 관해 위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일행 중에는 손문(쑨원)의 휘하에 있던 호남성 출신의 주황(저우쾅)이라는 폭탄 제조 기술교관도 있었다.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동지들과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에 재학한 기간은 2~3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기간에 그가 얻은 수확 중 하나는 폭탄 제조법의 학습이다. 이것은 훗날 그가 기술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의열단 폭탄 투쟁의 빈도를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이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마음 같아서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일본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상당수는 폭탄 투척 등의 방법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고 한국 민중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대는 물론이고 폭탄을 확보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있는 독립투사 강우규 역시 폭탄을 구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가 미수로 끝난 강우규의 폭탄 준비 과정에 대해, 박환 수원대 교수의 논문 '강우규의 의열 투쟁과 독립사상'은 이렇게 말한다. 1919년 상반기에서 하반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관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