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와 알렉스의 관계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히 '성애적' 혹은 '연애적' 관계에 국한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애인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친구이자, 알 수 없는 내일로 함께 발을 내딛는 동반자이다. 그들의 사랑은 사랑보다 큰 사랑이다.
리앤홍 인터내셔날
작품 속 시공간을 특정할 만한 별다른 무대장치도 없고, 신과 신 사이의 구멍은 이따금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후반부에 밀려들 감정의 파고를 만들기 위해 전반부에 감정을 쌓아가고 있는 과정들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온전히 두 배우의 대사와 감정 표현에 집중하고 봐야 하는 이 작품이 과연 대부분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33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나이 많은 남자와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의 로맨스가 차고 넘친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로맨스에서 여자는 남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존재이거나, 혹은 나이가 많은 남자도 의외로 매력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불행이나 장애, 그를 향한 폭력이 과하게 전시되기도 한다. 종류가 무엇이든, 결국 귀결되는 건 하나였다.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여성 캐릭터. 혹시 이 연극도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하이젠버그>가 그런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죠지와 알렉스는 동등한 관계이다. 비록 알렉스가 죠지에게 1만5000파운드를 주지만, 알렉스에게는 평생을 모은 돈이었고, 그게 알렉스의 경제적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알렉스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죠지는 그런 알렉스의 살결이 "유럽 같아요"라면서 오래돼서 좋다고 하지만 그건 남자의 늙음을 상대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대사는 아니다. 그건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낸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의미에 가깝다
비록 33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죠지도 알렉스도 모두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자기 인생을 살아온, 경험치가 꽤 쌓인 인물이다. 그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함께 많은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구원도, 착취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와 각자의 장애를 지닌 인물이었다.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동질감 덕분에 평등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이 작품은 그 동질감 위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빛을 발한다. <하이젠버그>의 이 빛은, 노란 색깔의 텅스텐 전구처럼 혹은 카페의 창문 밖으로 옅게 깔린 노을 빛깔처럼 따뜻하다. 그건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쓰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탱고를 추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