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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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튕겨져 나오듯 길 위를 걷는 사람들, 제주도에서의 나처럼 영화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나 이제 막 자기 삶을 살고자 하는 엄마 바비와 겨우 삶의 행복을 찾으려한 셰릴.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거짓말처럼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사랑을 경험케 해준 엄마는 셰릴의 말처럼 그녀 삶의 중심이나 다름없었고, 이후 그녀는 바람을 피우고 마약을 하며 방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셰릴의 삶은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그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 그녀의 눈에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PCT 트래킹 안내서가 들어오고,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기나긴 여행길에 오른다.
다시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서겠다며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 과정은 셰릴의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녀의 불평처럼 그 길에는 온통 험난한 바위가 가득했으며 메마른 사막과 내리쬐는 햇볕이 펼쳐졌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배낭은 그녀의 몸에 쓸린 상처를 남겼고 맞지 않는 신발에 발톱은 뽑혀져 나간다. 또한 그녀는 여행의 와중에 성폭력 위험을 마주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트래킹을 시작하며 그녀는 첫 방명록에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격언을 적는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것의 불가능함이다. 그 거친 길 위에서 그녀의 몸은 상처입고 고통 받기를 반복한다. 여성이라는 그녀의 조건은 편견과 불필요한 공포 앞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는다. 지나간 시간의 끔찍함은 셰릴로 하여금 절규하게끔 만들고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무릎을 꿇게 만든다. 그 몸은 초월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돌이켜보면 그것은 셰릴이 삶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운한 삶의 조건을 초월하고자 했고, 더 나은 인생을 살고자 욕망했다. 그래서일까 셰릴은 그러한 삶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했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하고 그녀와 충돌하기도 했다. 주정뱅이와 결혼 해 남은 것이라고는 쓰러져 가는 집과 빚더미뿐인 웨이트리스의 삶이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엄마를 힐난한다. 영화의 초반, 셰릴은 읽어 본적도 없으면서 제임스 미치너의 책이 좋다는 엄마에게 그런 구린 책이 뭐가 좋냐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여행의 막바지 그녀는 엄마가 사랑했던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트래킹의 마지막 방명록에, 셰릴은 미치너의 다음과 같은 격언을 남긴다.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자기 삶의 조건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의 욕망이지만,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대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참 고루한 말이지만,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을 겪고 자기 삶에 어떠한 개입도 없이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을 때, 어쩌면 셰릴은 보았을 지도 모른다. 날것 그대로인 삶의 맨얼굴을.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내버려 둔 그 삶은 참으로 야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누구나 펼쳐진 초원 뒤로 강이 흐르고,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바위와 먼지투성이의 길을 걷는다. 사뿐사뿐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의 몸은 살이 찢어지고 도랑을 구르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삶의 야만스러움이 우리가 아름답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셰릴에게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 최고의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찾아내면 어떻게든 지켜내고."나는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