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균의 사당 앞에서홍종우가 결국 실패했음을, 이완이 살아있음을, 조선의 명운이 다했음을 알리는 와다. 김옥균의 영은 와다의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한다. 동시에, 좌절하지 않는다. 도라지꽃이 피어날 그때를,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여전히 믿고 있다.
곽우신
이완으로 상징되는 거악은 지금도 현재 권력으로 실존한다. 우리는 제2, 제3의 이완이 청와대에서, 국회 의사당에서, 재벌 총수의 비밀 사택에서 숨 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스팔트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촛불은 물대포에 의해 꺼지고, 투표로 모인 우리의 뜻은 한순간에 사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또 실패할지 모른다. 오는 12일에 광화문 광장으로 집결할 의지도, 저 거악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는 외침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살을 찢고 내 피를 삼켜 다시 살아라 이곳에. 하얀 빛 구름 하얀 옷 사람들 함께 난 죽어서도 비 되어 다 뿌려지리. 흩어져 버려진 내 몸 이곳에 오게 하리. 조각난 내 뼈와 살 다시 날 살게 하리. 푸르런 하늘 푸르런 물결 속에서 난 내 뼈와 살, 내 뼈와 내 핏물 흘리리라. 흘려서 비 되어 살아나리. 그곳에서 난 다시, 다시."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2막 No.27 '저 바다에 날' 중에서그런데 이상하다. 홍종우의 죽음을 전달받은 김옥균의 혼은, 좌절이나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극을 닫는 노래는 '내일은 없다 리프라이즈(Reprise)' 같은 곡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피어나리라고, 살아나리라고 다짐하는 극의 마지막 노래는 오히려 희망과 환희로 차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국권이 침탈되고 민족의 운명이 외세에 넘어간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신음한다. 하지만 36년의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싸워 온 이들이 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다.
역사는 무수한 실패의 반복 속에 작은 성공이 켜켜이 쌓이며 진보한다. 근현대사의 질곡에서, 부정선거는 혁명으로, 겨울공화국은 봄으로, 군부의 잔재는 민주정부의 탄생으로 맞부딪혀 싸웠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는 사이에 시계는 때때로 거꾸로 흐르지만, 그만큼 다시 앞으로 전진할 기회는 반드시 오고야 만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해야 할 건 좌절이나 절망, 냉소와 포기가 아니다. 비록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도 정변을 일으키고, 내 목숨 버리더라도 저 잘못된 거악을 향해 뜨거운 총구를 겨누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이 땅에 도라지를 심는 일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그 도라지들의 흰 꽃이 만개할 날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을 실제로 하야하게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옥균이 태웠던 그 빛나는 의지가 홍종우에게, 독립열사에게, 민주투사에게 이어진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와 있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라지를 심는 일일 것이다. 아니, 우리가 도라지가 되는 것이다. 거리로 나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곧 피어나고야 말 도라지가 될 테니.
밤이 어둡다. 날이 춥다. 하지만 새벽은, 오고야 만다. 빼앗긴 들판에 봄은 반드시 온다. 김옥균을, 홍종우를, 더는 외롭게 두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