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배구협회 배구회관 건물 (강남구 도곡동)
박진철
대한배구협회가 새 회장 선거를 앞두고 술렁이고 있다. 후보자들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각종 설만 무성하다. 그러나 8월 초까지는 신임 회장 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이번 선거는 대한배구협회와 국민생활체육전국배구연합회가 '대한민국배구협회'라는 새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초대 통합 회장을 뽑는 선거이다. 의미와 무게감이 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인 출신 인사의 회장 출마설이다. 벌써부터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배구계뿐만 아니라 배구팬들까지도 정치인 출마설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치인 회장 시절에 한국 배구의 국제적 위상 추락과 협회 재정 악화 등 좋지 않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배구협회 회장의 면면과 재정적 상황만 돌아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80년 10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대한배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1983년에는 김중원 한일합섬 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백구의 대제전' 대통령배 배구 대회가 창설됐고, 남녀 실업팀들이 속속 창단되면서 겨울철 인기 스포츠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했다.
최영준 KB손해보험 사무국장은 "김중원 회장 시절이 대한배구협회와 국가대표에게는 봄날이었다"며 "김 회장은 1984년 LA 올림픽 예선전 때 본선 티켓만 따도 선수 전원에게 아파트 한 채씩 주기로 공약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1989년 3월 안병화 회장부터 2005년 5월 한준호 회장이 사임할 때까지 무려 16년 동안 한국전력의 사장이 자동으로 대한배구협회 회장을 맡았다. 한국전력은 회장사로서 매년 10억원 안팎의 지원금을 대한배구협회에 출연했다.
정치인 회장 시대, 남녀 동반 올림픽 진출 실패그러다 2005년 8월, 대한배구협회가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장영달 의원을 신임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 회장'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장 회장의 임기 동안 대한배구협회는 집행부 내부 인사들의 알력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장 회장 역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내분 사태는 장기화됐다.
그러던 중 2008년 6월 한국 남녀 배구가 모두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 남녀 배구가 올림픽 본선에 동반 실패한 것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배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정치적 이유로 불참했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제외하면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배구협회는 거센 비난을 받았고, 그 책임을 지고 이사진 전원이 사퇴했다. 또한 대한배구협회 산하 5개 연맹과 배구 원로단체인 대한배우회는 장 회장을 비롯해 집행부 총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장 회장은 2008년 7월 "남녀 배구의 올림픽 동반 탈락과 월드리그에서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한배구협회는 그해 8월 총회를 열어 장 회장 사퇴 안건을 의결했다. 임기 4개월여를 남겨놓고 사실상 불명예 퇴진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배구협회는 또다시 정치인 회장을 추대했다. 2008년 9월 당시 집권 여당 실세였던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새 회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의혹 많은 배구회관 매입, 배구발전기금 탕진임태희 회장의 재임 시절 대한배구협회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배구회관 건물(강남구 도곡동)을 무리하게 매입하면서 큰 재정적 손실을 초래했다.
전임 회장의 출연금 등으로 조성한 자립기금과 대한체육회로부터 받은 기금을 합쳐 70억 원을 털어넣은 것도 모자라 113억 원의 은행 빚까지 얻어 배구회관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순수 건물값 162억 원과 세금·부동산 중개 수수료 등 부대비용까지 포함해 총 177억8천만 원이 들어갔다. 특히 건물값 162억 원은 당시 감정가인 130억 원에 비해 32억 원이나 비싼 것으로 비리 의혹의 표적이 되었다.
그 결과 한때 건물 시세가 내려가면서 대한배구협회가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기도 했다. 현재도 손실 상태인 건 마찬가지다. 최대한 시세(약 145억 원)대로 매각을 해도 매입 당시 대한배구협회가 지불했던 금액 178억 원에서 33억 원은 고스란히 허공으로 날아간다. 그 돈은 대한배구협회가 배구 발전에 사용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알뜰살뜰 모아 온 것이다. 매각 후 대한배구협회가 손에 쥘 수 있는 금액도 은행 대출금을 갚고 나면 30억원 정도만 남는다.
결국 2014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배구협회를 부적절한 단체 운영의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배구회관 건물 매입을 주도했던 부회장 2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매입 과정에서 브로커인 친형을 통해 중개수수료 명목으로 1억3200만 원을 받은 혐의가 있는 부회장 1명을 기소했다. 그리고 올해 1월 대법원은 해당 인사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과 1억 3200만 원의 추징금을 최종 확정했다. 형이 확정되면서 배구인들은 건물 매입과 임태희 회장의 관계에 대해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올림픽 4강에도 '손가락질' 받은 대한배구협회대한배구협회가 배구회관 매입 이후 재정적으로 불안정하다 보니 국가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원활히 될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임 회장은 재정 낭비하고 국가대표팀 행정 지원에도 무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여자배구 대표팀에 대한 부실한 지원이다. 한 금융기관에서 2억 원의 후원금을 제공했지만, 임 회장이 참석한 출정식 행사를 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르면서 8000만원을 썼다. 보여주기식 일회성 행사에 돈을 낭비할 게 아니라,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사용했어야 한다는 원성을 샀다.
더 심각한 것은 선수단에게 가장 필요한 스태프 추가 문제였다. 대한체육회가 당시 전병헌 의원에게 제출한 '런던올림픽 종목별 임원 AD카드 발급현황'에 따르면, 배구에 발급된 AD카드가 단 3명(김형실 감독·홍성진 코치·최광희 전력분석원)에 불과했다. 구기 종목 중 가장 적은 인원이었다. 전 의원 측은 "대한배구협회가 단 한 명의 실무진이나 임원도 AD카드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AD카드(Accreditation Card)란 올림픽 선수촌 및 경기장 출입증을 말한다. AD카드가 없으면 지원 스태프가 따라가도 전혀 도움이 못 된다.
당시 일부 언론은 여자배구 대표팀에 대한 무관심과 대한배구협회의 무성의한 지원을 빗대 '우생순 배구'라고 표현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런던 올림픽에서 36년 만에 4강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지만, 정작 대한배구협회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한국 남자배구가 월드리그에서 12전 전패를 기록한 것도 임 회장 재임 시절인 2010년 월드리그였다.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것은 물론, 단 1점의 승점도 따내지 못했다. 월드리그 출전 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결국 임태희 회장도 2014년 10월 임기를 2년 넘게 남겨놓고 사퇴를 발표했다. 임 회장의 사퇴에는 배구회관 매입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대한배구협회 재정 악화, 집행부의 무능과 무기력 등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그런 것들이 누적되면서 사퇴 압박을 받고 중도에 불명예 퇴진을 한 셈이다.
정치인 회장의 종언, 다시 시작된 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