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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엘렌 페이지, 한국은 왜 '멘붕'에 빠졌나

[하성태의 사이드뷰] 성소수자에 대한 감동적 연설에도 선정적 보도만 일삼은 한국 매체

14.02.18 08:45최종업데이트14.02.1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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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현지시각)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지난 14일(현지시각)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HCRF

최근 '커밍아웃'으로 주목을 받은 배우 엘렌 페이지. 그가 지난 (하필 '사랑'으로 전 세계가 충만한) 밸런타인데이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인권 캠페인'(The Human Rights Campaign) 컨퍼런스 연단에서 한 연설이 화제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인들이 확인한 이 연설 중 한 대목은 자신을 다룬 다수 한국 매체들에게 미리 들려주는 예언과도 같았다.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의 커밍아웃에 '충격'과 '경악'에 빠진 기사 제목을 쏟아낸 그 매체들 말이다.

"저는 가십기사를 읽지 않지만, 제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헬스장에 가는 사진을 찍은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기자가 이렇게 썼더군요. '왜 저리 작고 예쁜 애가 덩치 큰 남자처럼 입고 다니지?' 왜냐면 전 편한 게 좋으니까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 관념은 이렇게 널리 퍼져 있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성소수자임을 감춰야 했던 엘렌 페이지는 인터뷰나 현장 사진이 아닌 파파라치 컷임에도 성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여과 없이 드러낸 그 기사를 보고 얼마나 씁쓸했을까. 그런데 엘렌 페이지의 커밍아웃이 소식이 지구 반대편인 한국으로 전해지자 그 편견은 선정성이 덧칠된 채 인터넷 공간을 뒤덮기에 이르렀다. 먼저 '충격' 받고 먼저 '경악'하는, '심장 약한' 매체 종사자들 덕분이다.

여배우의 커밍아웃에 '멘탈붕괴'된 한국 매체들?

 엘렌 페이지 관련 기사를 쏟아낸 충격의 동아일보와 스포츠동아.
엘렌 페이지 관련 기사를 쏟아낸 충격의 동아일보와 스포츠동아. 네이버 캡처

[화보] 엘렌 페이지, 커밍아웃 충격…"난 레즈비언…이제 고통받지 않겠다"
엘렌 페이지 "난 레즈비언"… 헉
엘렌 페이지 "난 레즈비언"… 당황스럽네!
엘렌 페이지 "난 동성애자"… 멘탈붕괴!
엘렌 페이지 "거짓말 하고 싶지 않다…" 커밍아웃 충격 그자체

가장 헉하게 놀라고, 당황스러워 멘탈까지 붕괴되어버린 매체는 단연 '동아'다. <동아일보>와 <스포츠동아>는 엘렌 페이지의 커밍아웃 소식이 알려진 15일 오후 이후 무려 34건여의 기사를 기계적으로 쏟아냈다. 17일 오전 10시 기준으로 1시간에 한 번씩은 충격을 받은 꼴이다.

소위 포털을 이용한 '검색어 장사'를 감안한다고 해도, 그 횟수며 기사 제목의 단어들로 봤을 때 충격의 강도가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매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일, 커밍아웃 소식 자체에 충격을 받은 매체들은 이튿날 지난 2009년 마리클레르 미국판에 게재됐던 엘렌 페이지와 드류 배리모어의 키스 화보를 '발견'하고, 이를 후속 보도하면서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제목들이 한 술 더 뜨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엘렌 페이지 커밍아웃 "난 레즈비언이다 '충격'…과거 드류 배리모어 화보...
엘렌 페이지, 과거 드류베리모어와 키스..."쩍벌 19금 포즈"
엘렌 페이지 커밍아웃, 드류 배리모어와 무슨 짓?
엘렌 페이지 커밍아웃, "거짓말 하는것에 지쳤다"..과거 드류 배리모어와?

이런 기사들 아래 달린 댓글들 중 상당수가 호모포비아에 가득 찬 악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 모른다. 편견을 먼저 드러내고 선정적인 의도를 숨기지 않는 기사들에 반응하는 이들이 차분히 성소수자들의 상황과 인권에 대해 돌아볼 여유를 갖췄을까.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계속 세상을 바꿔 주세요"

이틀 동안 한국 매체들이 쏟아낸 기사들의 주된 내용은 엘렌 페이지의 연설 발언 중 일부와 드류 베리모어와의 화보, 그리고 엘렌 페이지의 간단한 약력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8분여에 걸친 이 연설을 제대로 확인(하거나 심지어 한글 자막이 수록된 영상이 누리꾼들로부터 화제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담은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엘렌 페이지의 연설은 성수소수자들은 물론 인권을 고려하는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경청할 만 했다.

"여러분은 서로 조금만 덜 못되게 굴어도 세상이 훨씬 나아지리란 믿음으로 여기에 모였어요. 서로의 차이점을 공격하는 대신, 5분만 투자해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게 오히려 더 쉽게,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이죠. 궁극적으로,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요."

엘렌 페이지의 연설은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또 그 공격성이 소수자들을 얼마나 괴롭히는지을 일깨우고 있다. 또 그 공격을 거둔다면 세상이 좀 더 평화롭고 유의미해질 거란 믿음을 담고 있다.

청중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유명 여배우로서 지닐 부담감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에 대한 감응도 함께 담겨 있으리라. 실제로, "나는 게이다"(I'm gay)라고 내뱉기 전 떨리는 그의 음성에서 이 1987년생 여배우가 짊어졌을 심적 부담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을 숨겨왔던 괴로움과 아우팅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의무감과 사회적인 책임감",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커밍아웃을 결심하게 됐다는 엘렌 페이지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거쳐 왔던 모습인 어린 성소수자들을 염려하고 그들에 대한 응원을 당부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이 게이)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에게 너무 많은 (학교) 자퇴, 학대, 가출, 자살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그걸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죠.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계속 세상을 바꿔 주세요. 해피 밸런타인데이, 사랑합니다."

남다른 행보 펼친 엘렌 페이지의 차기작도 '동성 커플' 연기
 '나는 남자 속옷을 입어요'란 팻말이 인상적인 엘렌 페이지의 예전 모습.
'나는 남자 속옷을 입어요'란 팻말이 인상적인 엘렌 페이지의 예전 모습. 엘렌페이지넷

우리에게 <인셉션>과 우디 알렌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로 더 친숙해진 엘렌 페이지의 행보는 분명 남다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게 해 준 <주노>에서는 당당한 10대 임신부를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직후 선택한 드류 베리모어의 연출작 <위핏>은 남성적인 '롤러더비' 경기를 통해 성장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스마트 피플>에서도 그는 명석한 두뇌 탓에 보통의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바네사를 연기했다. '소수자 은유'로 유명한 <엑스맨> 시리즈 3편에도 얼굴을 비췄고, 최신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는 올 여름 개봉 예정이다. 그 즈음 촬영에 돌입하는 차기작은 줄리안 무어와 동성커플을 연기하는 <프리 헬드>다. 

<주노>를 필두로 앨렌 페이지는 사회적 약자, 그러니까 사회 주류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거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냈다. 커밍아웃이라는 용기를 낸 그가 미국이나 한국,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차별적인 시선을 딛고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부디 유지하기를.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커밍아웃이 의미를 잃지 않는 길임인 동시에, 또 자신이 원했던 대로 여러 사람들에게 (긍정적)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엘렌 페이지 커밍아웃 주노 인셉션 엑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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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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